뻔뻔하구나!
인간이 탄생하였다는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에덴동산을 떠난 이후 수천 년을 이어오면서 어느 시기에나 선과 악은 존재하였으나 항상 선인이 악인보다 항상 많았다. 우리의 장내 세균이 유익균과 유해균의 비율이 90:10에서 보듯이 이 비율이 깨지지 않아야 건강하듯이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이 비율이 깨지면 우리 몸은 온갖 질병으로 시달리듯이 악인이 많이 있으면 전쟁 등등이라는 끔찍한 사건으로 많은 무고한 생명이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그냥 버려졌다. 그래도 지금까지 순간적으로 악인의 존재에 의해서 역사의 순간적인 비극은 있었지만 더 많은 선인들 때문에 화평을 유지하여 왔다.
옛날에는 어떤 사안에 있으면 사서오경 등 경전을 근본으로 하여 해석하였기 때문에 답은 거의 하나였다. 그 원칙의 틀을 깰 다른 이견을 제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하나의 사안에 대하여 보는 시각에 따라 의견이 각기 다르다. 그러다보니 자기 스스로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뻔뻔스럽게도 자기의 합리화를 위하여 온갖 궤변을 늘어놓는 일은 비일비재한다. 그것은 우리 일반 보통사람들보다도 이름이 있다는 사람들에게서 그 모습이 많이 보인다. 특히 자기들 만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일을 하는 것처럼 이 존엄한 단어를 조자룡 헌칼 휘뒤르듯 남발하고 있다. 최근의 사례를 보면 ‘국민이 지킨다’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버려야 한다고 하는데도 몇몇 소수인들만 국민이라는 단어를 내세워 지키려 한다. 과연 이것을 옳은 주장이라 할 수 있을까?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어린아이가 들어도 자다가도 웃을 말로 자기방어를 한답시고 늘어놓은 말이 가관이다. 자기가 기획하고 실행한 일에 대하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아니다’라고 뻔뻔스럽게 얘기하고 있다. 그러면 일어났어야 했다는 말이란 말이냐?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일어났어야 했는데 아쉬움은 아주 많이 남았겠지...! 지금도 구치소에 있으면서 그는 이렇게 되뇌이고 있겠지! ‘성공만 했다면 너희들은 싹 수거되어 어디론가 버려졌을 텐데 ... 아쉽다’ 이렇게 말이다. 자기는 아쉬울지 몰라도 스스로 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장본인데도 반성하는 단어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만일 성공했다는 것을 가정해본다면 어떠했을까는 불을 보듯 명확했을 것이다.
‘용서하라! 그리고 황후도 용서하라!’ 신라 제26대 진평왕이 만백성을 향하여 외치는 한마디였다. 쌍음으로 태어난 덕만을 버린 죄를 사하여 달라고 만백성에게 고하는 외침이었다. 그날은 북두의 일곱 별이 여덟이 되는, 일식이 있던 날로 ‘미실’로부터의 억눌림을 벗어던진 용기있는 외침이었다. ‘용서하라! 이 얼마나 위대한 말이더냐?
삼국유사에 실린 경상도 의령 땅 백월산에서 도를 닦고 있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에게 비바람 치는 어느 날 산중 움막을 찾아 몸을 의탁하려 했던 배부른 여인을 매정하게 다시 폭풍우 속으로 내몰았던 다음 날 자기의 잘못을 뒤늦게 뉘우치고 노힐부득 앞에 엎드려 통곡하는 달달박박을 보고 하는 말 ‘비바람이 치는 날 비를 피하기 위하여 찾아온 여인의 입장에서 생각해야지 자기의 입장만 고집하면 되느냐?’ 그리고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라고 했다. 이것은 용서하기에 앞서 정말로 잘못했음을 간절하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뻔뻔스런 얼굴을 하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외지부에게 의존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국민들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라. 그것만이 당신이 살 수 있는 길이다. 충무공은 ‘死卽必生 生即必死’라 했다. 모씨와 같은 역사적 죄인의 길을 가려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