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홍제 박종추 나주시 지회장
농민회운동가·사회운동가·시민단체운동가·가수 활동으로
이웃 사랑에 열정 쏟아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더 많이 잡는다'라는 격언이 있다. 부지런한 사람이 먼저 이득을 보고 기회를 잡아 결국엔 성공한다는 뜻으로 자주 쓰인다. 그리고 부지런한 인생을 꾸며간다는 것은 근면 성실히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최고의 덕목이기도 하다.
한편, 불교의 가르침 중 정진(精進)이란 단어가 있다. 이는 부지런함을 뜻하는 것으로 '이 세상에 게으른 사람 치고 잘사는
사람, 환영받는 사람은 없고, 반면에 부지런하면 본인에게도 좋은 결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나 환영받는 사람이 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부지런한 사람은 '일만 하는 사람'으로 곡해해서는 안 된다. 유명한 석유왕 록펠러가 생전에 남긴 '일만 하는 사람은 돈 벌 시간이 없다'라는 문구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며 삶의 지혜를 깨우치게 했다. 수많은 이웃 즉, 일할 줄 아는 사람이 놀 줄도 알게 했고, 사람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진심으로 그들의 고통을 나누려는 마음을 일구는데 기여도 했다. 이렇게 주변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슴에 담으며 사소한 일에도 이웃돕기에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으며 봉사하는 사람도 많다. 본지 246호에는 평생이 나주인임을 자랑으로 생각하며 일이 주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찾아서, 일확천금이나 공짜를 노리지 않으며, 천천히, 꾸준히, 규칙적으로, 서두르지 않고 일하는 정직하고 부지런한 나주인 (사)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나주시 홍제 박종추 회장(이하 박 회장)을 소개하는 글을 올려본다.
▶ 열정과 배려로 다진 성공 가도
박 회장은 20세~21세까지 약 2년의 서울 직장생활을 제외하고 평생을 나주에서 생활한 토박이로 '근면·성실·봉사 정신'을 생활신조로 가슴에 담고 이웃을 배려하며 봉사하며 성공 가도를 걸어온 자랑스러운 나주인이다. 돈? 명예? 모두 아닌 이웃사랑과 사회개혁 그리고 모범 가장 실천으로 존경받는 나주인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박 회장의 삶의 길이었지만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닌 그의 끝없는 희생정신과 이웃사랑의 실천이었다. 나주시 세지면이 고향인 그는 넉넉지 못한 3남 3녀의 가정에서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도우며 성장했다. 박 회장은 일의 대가보다 일할 기회를 귀하게 여기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일에 대한 목적과 철학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18세에 농촌 청소년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목표로 시작한 농촌지도사업의 지역사회운동 4-H 클럽 활동과 농어민후계자 세지면 회장을 역임, 농협 대의원과 새마을지도자 등 젊은 농부로서 지역을 위해 봉사활동에 앞장선 것을 필두로 한 나주농민회 창설멤버로 막걸리를 마시면서 잘사는 농촌 만들기에 헌신했다. 다른 한편 전문 농업인으로서 인정받는 나주 군수로부터의 다수확 상을 받기도 했다. 특히, 박 회장이 돋보이는 것은 순수한 농민의 자세를 벗어나지 않고 사욕을 탐하지 않는 희생정신이다. 그는 1972년 한국가톨릭농민회, 1978년 전남기독교농민회 창립을 거쳐 각 지역 농민이 사회적 지위 향상과 권익 확보를 목표로 결성한 농민운동조직인 ‘농민회’ 활동을 시작해 20대 초반에 현재의 영산동노인복지회관 맞은편 공터에 10여 명이 천막을 치고 결성식과 출범식을 하고 ‘세기면 농민회’ 문화부장과 홍보부장을 맡아 농민회 활성화를 위해 앞장섰다.
당시 농민회 활동에 앞장선다는 것은 정부의 감시와 탄압의 강도가 심해 참으로 힘들었지만 '성취감과 보람, 성취의 기쁨'을 찾기 위해 몸과 마음의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나주경찰서 정보과에서 요주의 인물로 지적받으며 감시 대상이었던 박 회장의 열정적인 농민회 활동은 널리 알려져 미국 인권단체로부터 격려의 편지를 받기도 했었다.
▶ 도전과 실패 그리고 위기 극복
농촌 부흥을 위한 ‘농민운동’으로 인한 농업에 집중하지 못한 박 회장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농민운동에 보탬이 되고자 ‘멜론’ 농사를 위해 그동안 키우던 소 16마리와 논을 처분해 비닐하우스 사업에 도전했다. 자신 나름대로 시간적 여유를 찾기 위한 과감한 도전이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하우스 농사 박 회장의 7년은 그야말로 고통의 세월이었다. 1억 5000만 원 투자금은 모두 잃게 되었고, 오직 정부 탓·남의 탓으로 돌리며 농민운동에 열중하며 자신을 위로했지만 깊은 실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현명한 박 회장은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과감한 결단력으로 자산을 정리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아쉬웠지만 농민운동도 마감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믿었던 보증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가진 논 등 가산을 처분해 말끔히 정리하고, 남은 빚을 안은 채 농업과 더불어 신문 사업(세계일보, 한국일보 나주지국)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30세 당시부터 하루 단 3시간의 수면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사업 현장에 몸을 던졌고 35년의 세월이 지났다. 지금 박 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남은 빚도 갚았고 농업과 사업으로 발생한 수입금은 아주 많은 돈은 아니지만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배려하고 있다. 사랑받고 존경받는 이유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도 몸과 마음 모두가 건강하고 변함없이 인생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 재탄생 - 꿈은 이루어진다.
박 회장은 자신의 순탄치 못했던 시절의 위기 극 인생 반전을 통한 재탄생을 '신앙의 힘이 크게 차지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실의에 빠져있던 시절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통일교에 입교하게 된 박 회장은 특유의 정직함과 부지런한 몸가짐과 열정으로 정신적인 안정과 꾸준함으로 가정을 갖게 되어 지금은 부인 게이꼬 여사와 3녀 1남의 모범가장으로 평판이 높다. 뿐만이 아니라 교회 중견으로 인정받고 계열 (사)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나주시 회장. (사)다문화종합복지센터 나주시지부장의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신문 사업(세계일보, 한국일보 나주지국)을 해왔다. 최근에는 나주교육 살리기와 나주 역사 문화 발굴을 해 나주의 옛명성을 되찾고자하는 목적으로 나주 살리기 시민운동본부 총괄기획부장으로 단체를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60세 들어서며 박규남이라는 예명으로 '내가 내가 사랑한 사람'이라는 곡 발표로 가수에 데뷔했다는 놀라운 도전이다. '나주의 길손'이라는 곡의 작사가로 이름을 올렸다. 집안 어르신들의 눈초리에 감히 얘기를 꺼낼 수도 없었던 가수의 꿈을 이루며 팔방미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근면·성실·봉사 정신'을 기반으로 이웃으로 존경받는 박 회장은 '그의 꿈을 지지해 주고 용기를 준 아내에게 너무나도 고맙다'라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그이 순수함과 사랑이 모두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