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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기자명 신동운

나주를 찬미한 시조 ‘금성산 수려’ 작사 편곡

  • 입력 2014.05.29 16:12
  • 수정 2014.05.29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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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목주자(木柱字) 기능보유자

 
시조(時調)는 시절가조(時節歌調)에서 유래한다. 한국 고유의 정형시 ‘시조’를 노래하는 전통 성악곡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가로 한문 문화가 모든 문화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시기에 우리말로 노래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살렸다. 고려시대에 형성되어 현대시조로 전승된 전통적인 문학의 한 장르로 양반과 평민 모두가 지었던 국민문학으로서 나주에도 40여 년 동안 시조경창대회가 열리고 있으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전통 살리기에 정열을 쏟고 있다.

오늘은 나주 유일의 시조 작곡자이신 운정(雲亭) 황응규(92)옹을 만나 보았다. 황옹은 1922년 1월 10일 전남 화순군 남면 송산에서 부친 황선윤과 모친 강보예 사이에 1남 2녀 중 장남(독자)으로 태어났고,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집안의 온갖 사랑을 다 받으면서도 긴 머리에 흰옷을 즐겨 입으시던 멋쟁이 할아버지의 독특한 교육관에 의해 효당 김문옥 선생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게 되었다. 한학이라고 하면 특별한 교육기관 아닌 서당이었다. 물론 일제치하 시절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할아버지의 고집이 아니었으면 학교에서 공부할 여건은 갖추었으나 아예 초등학교 문턱조차도 밟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고집이 밉기는 하였으나 평소 긍정적인 사고의 소유자인 황옹은 섭섭함보다 주어진 환경에서 미래를 찾았다. 한학에 열중하고 한학에 빠져 즐거움을 찾았다. 당시 수학했던 한학이 황옹의 인격형성 근원이 되었고 배려와 사랑을 심원한 한학의 글을 통해서 몸에 익히게 되었다. 15세가 되어 한학 수학을 멈추고 귀농하여 가사를 돕게 된다. 가사를 도우면서 주위의 권고로 목주자(木柱字 : 주로 목판으로 족보를 인쇄)의 기술을 습득하게 되어 당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세가 되어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전 식구가 보성군 문덕면 웅곡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좀 더 큰 농사터전을 마련하여 가게 된 보성은 당시 교통이 불편하였지만 생활함에는 별 어려움은 없었다. 젊은 시절 농사에 열중하면서도 유년시절 학교 대신 선택한 한학의 공부를 한 순간도 잊혀본 적이 없다. 그의 피에는 항상 열정에 잠겨 있었다. 일제치하에서 해방이 되어 불과 5년 만에 민족의 비극 6.25가 시작되었다. 온 국민이 큰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격동의 시대였다. 그 중 가장 아픈 것 중의 하나가 이웃의 고발과 살해 행위였다. 그러나 황옹의 주변에서는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따뜻한 마음의 보답이었다. 독자인 황옹은 21세에 결혼한 후 슬하에 11남매(7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새로운 인생을 선물해 준 나주

1988년 주암댐 건설은 새로운 인생을 걷게 하였다. 생활터전이 물에 잠기게 된 것이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나주시 금천면에 마련하고 이사를 하였다. 66세의 나이였다.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새로운 도전의 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唱)이었다. 명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평시조 1등(2000년. 경북금천)을 시작으로 여러 해에 갑부시조 1등(2001년 여수지회) 5·18 추모행사 특부 1등(2002년 광주·전남지회) 명인명창부 1등(2006년 전북남원지회) 국창부 장원(2010년 제주도) 등 전국에서 그 동안 갈고 닦아온 나주시조회의 저력을 전국에 알렸다. 대상을 받지 못한 한 가지 아쉬움을 갖고 있었지만 황옹은 본인의 나이에 욕심이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지만 욕심은 금물이고 또 다른 화를 부른다는 것이 그의 아름다운 철학이었다.

늦은 나이에 황옹은 마침내 나주를 찾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늘 행복으로 여기고 감사했다. 황옹만이 가질 수 있는 멋이었다. 창을 좋아하고 글 읽기와 시 쓰기를 좋아한 황옹은 나주남평향교의 제장, 고문, 나주시조회장, 노인회장 등 많은 역할을 다했다. 또한 나주를 찬미하여 시조 ‘금성산 수려하여’ 등을 직접 작사하고 100여 수가 넘은 한시를 지은 시인이기도 하다. 황옹에게 나주는 새로운 도전으로 성공과 행복을 선사받은 기회의 땅이었다.

지금 황옹은 시조회의 선도적 역할을 해주시는 이순규, 정제갑, 박종심, 김형수 외 여러 선지자와 함께 47명의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간절함도 있지만 시조에 대해 꺼지지 않는 불씨를 항상 감사히 여기는 여유도 잃지 않고 있다. 한학 수학과 유교정신으로 몸에 익혀진 황옹은 효사랑과 배려의 아름다운 선조들의 정신이 젊은이들에게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버리지 않았다.

2시간의 긴 대화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황옹에 깊은 경의를 표하면서 재회를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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