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문화·교육
  • 기자명 빛가람타임스 기자

조선시대 가장 웅장한 객사 건축물의 나주 금성관

  • 입력 2014.04.05 10:51
  • 수정 2014.05.17 16:43
  • 댓글 0

명품도시 나주의 역사 발자취

▲ 망화루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8(과원동)에 자리한 금성관은 조선시대 나주목의 관아 건물 객사이다. 객사란 고려~조선시대 때 지방궁실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또는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양쪽의 익사(翼舍)에서 유숙하게 하던 곳이다. 지방의 도읍지에 관아건물이 들어서면 일반적인 경우는 중심축선상에 동헌과 정문, 루문 등이 자리하고 주변에 육방관속의 건물과 내아가 위치한다. 현재 옛 나주읍성내에는 나주목사내아(內衙), 관문(官門)인 정수루(正綏樓)와 서문밖에 나주향교 등이 있다. 금성관 정문은 망화루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없어졌던 것을 2003년 복원하였다.
금성관은 조선 성종 18~20년(1487.4.12~1489.7.20) 동안 이유인목사가 2년여 동안 재직하면서 김춘경목사가 건립한 객관의 동헌인 벽오헌 옆에 금성관과 벽오헌 남쪽에 망화루를 건축하여 궁실의 구조를 갖추었다. 이후 선조 36년(1603)에 크게 중수를 하고, 고종 21년(1884) 박규동 목사가 3창을 했다.

일제 강점기 이후 군청 건물로 사용해오면서 원형이 파괴되어 1976년에서1977년 사이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지정일 1972.01.29)로 지정되어 있으며, 곁에는 삼층석탑(보물50호), 사마교비, 금성토평비, 목사선정비 등이 있다.
금성관의 건축양식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익공집 팔작지붕이다. 그러나 칸 넓이나 높이가 다른 건물보다 크게 되어 정청으로서의 위엄하다. 금성관의 공포형식은 익공형을 하고 있으며, 원래 익공집은 궁궐이나 정전 등의 부속건물과 누각, 정자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중기 이후부터는 목조건축물에 있어서는 다포계와 주심포계가 혼용되다가 새로운 형태로 익공계 양식이 대두되었다. 금성관은 고흥의 존심당과 함께 익공형식으로 관아건물의 유사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내부는 모두 대청으로 꾸몄으며 우물마루를 깔았고, 대형의 막돌초석에 약간의 배흘림을 둔 두리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10개의 내진고주(內陣高柱)를 세웠으며 기둥 위로는 주두(柱頭)를 얹고 창방을 걸었으며 주칸마다 소로 2개 화반 1구씩 배치하였다. 공포는 주심포계 익공식으로 살미첨자와 끝은 쇠서로 되었고 행공점차를 두어 외목도리를 받게 하였다. 가구는 내진고주 위로 대량을 걸고 그 위로 동자주를 올린다음 종량을 얹힌 9량가(樑架)로 되어 있다. 창호이 구성은 중앙 세칸은 4개의 빗살문으로 되었고 양쪽 툇간에는 빗살문 2개를 달았다. 측면 역시 빗살 창문으로 중앙 2칸은 4짝, 양편, 2칸에는 2짝이다.공포구조는 나주향교 대성전의 공포구조와 비슷하여 조선 중기 나주지역의 건축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 금성관 전경

나주 금성관은 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그 규모가 웅장하고 커 전주 객사(보물 제583호)와 함께 전라도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한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으며, 뒤편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650년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김천일 의병장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며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 이곳에서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했다. 나주시는 금성관을 문화재 위상과 역사적 가치에 걸맞게 관리하기 위해 국가사적인 나주읍성과 나주향교 일대 문화재보호구역을 확대 조정하고 있다.


<주변관광지>
나주목문화관 (0.1Km) 정수루 (0.1Km) 목사내아 숙박체험 (0.2Km)
나주목사 내아 (0.2Km) 나주 박경중 가옥 (0.3Km) 남고문 (0.5Km)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