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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무적(仁者無敵) 합리주의자 나주향교 전교(典校) 오인선(吳仁善) 옹(翁)

  • 입력 2021.06.12 04:01
  • 수정 2021.06.12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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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무적(仁者無敵) 합리주의자 나주향교 전교(典校) 오인선(吳仁善) 옹(翁)

유림 자원의 균형적 발전과 나주향교 유네스코 가입을 지향하는 의지의 나주인

오인선 전교
부인과 함께 즐기는 오붓한 여유  

 

  나주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목(牧)의 지위를 유지한  전라도의 대표적 읍치였다. 나주향교, 관아의 정문인  정수루, 사신이나 관리의 숙소로 사용된 객사  금성관  등이 있으며, 향교는 훌륭한 성현들을 춘추 석전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나주향교는 조선 시대 교육 시설의 규모를 따지면 성균관 다음이라고까지 지칭될 정도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교육과 제사의 고유기능을 간직하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향교는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 받아 교수가 유생을 가르쳤으나, 신 학제 실시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지역 유지를 중심으로 유학 정신 계승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으며, 나주시의 문화사업 추진에 힘입어 지역사회의 윤리 및 문화 창달을 위한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 나주향교는 전교(典校)를 중심으로 장의(掌議)들이 유교 이념의 계승·발전과 향사 및 교육을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천년고도 나주목의 자부심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신임 전교가 치열한 경쟁이 아닌 덕망 높은 분을 찾아 호선이라는 추대로 나주향교가 오랜만에 어른 문화의 산실로 자리 잡고 지역화합의 마중물이 될 수 있는 기대가 커졌다. 지(知)와 덕(德)을 함께 갖춘 덕망가가 나주향교라는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구성원들로부터 추대를 받아 새 전교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본지 169호에는 존경과 사랑 속에 새로운 조직으로 재도약이 기대되는 나주향교의 책임자 28대 전교(典校) 성죽(成竹) 오인선(吳仁善 이하 오 전교) 옹(翁)을 찾아 글을 올려 본다.

 

  ▶ 지혜로운 덕치로 존경받는 나주인 상

  먼저 전교 오인선옹은 타고 난 덕장이자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인물로 사안에 따라 내유외강과 외유내강을 겸비한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인지 중책이 주어질 때마다 자신의 적극적인 접근보다 주위 인사들의 추천 때문에 소임을 맡고 책임을 다하는 형이다. 그리고 오 전교는 평생을 인자무적(仁者無敵)의 철학으로 인생 여정을 갈고 닦아온 합리주의자이다. 지금은 나주 사회에서 뿌리 깊은 나주향교의 전교로 추대되는 둥 어르신을 대표하는 존경받는 인물로 만인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다. 또한,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의지의 한국인이자 자랑스러운 나주인이다.

오 전교는 태어난 후 강진중학교와 목포 덕인고 수학 6년의 생활을 제외하고 태생지 나주시 공산면을 중심으로 나주 전역에서 농업계와 경제계 그리고 천년고도의 문화 창달과 계승발전을 위해 명소 나주향교의 중흥에 지대한 공헌으로 2003년 제9회 나주시민의 상을 수상한 토박이 정통 나주인이다. 그리고 오전교는 1947년 11월 5일 는 전라남도 나주시 공산면 남창리에서 아버지 고(故) 오재근 선생과 어머니 고(故) 임석현 여사 사이에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전교는 소년 시절은 세상에 태어나 그의 잠재적 능력을 꽃피우기 위한 혹독한 시련 극복을 위한 기회의 시간이었다. 선친 오재근 선생이 불과 42세의 나이에 6남매를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시자 16세의 어린 나이에 가장의 역할을 맡아야만 했으며, 1960년대 국민소득 추정 167불 시대 온 나라가 가난했던 시절 소년 가장의 역할은 하늘이 막막할 정도로 큰 부담이었지만 오 전교는 그 큰 산을 넘어섰다.

지금도 그 시절을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힘이 들었지만, 역경을 극복하고 5남매 독립까지 책임을 다한 거인이다. 어린 나이에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가정을 이끌고 직장에선 쉴 틈 없는 업무처리로 근면·성실함과 우수한 자질을 인정받아 성공 가도를 이끈 것이다. 그러나 힘든 역경을 겪어가면서도 일찍 소천하신 부친을 단 한 번도 원망해본 적 없고 모친 봉양을 다 한 효자이다. 그러면서도 힘들었지만 아무런 불평도 없이 5형제와 자녀 4남매 결혼과 함께 독립에 헌신해 준 부인 최화례 여사의 사랑 가득한 동행에 팔불출을 자처하며 감사와 사랑을 눈물에 담은 아름다운 사연을 전했다. 또한, 불과 36세의 나이에 6남매 성장의 무거운 짐을 홀로 되신 모친의 자녀ㆍ손녀 사랑과 희생은 눈물겨웠던 역사였고 오 전교의 버팀목이었다.

 

  ▶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지 않는 미래를 선도하다.

  오 전교는 20세의 나이에 나주농업협동조합(중앙회) 근무를 시작으로 40여 년 재직기간 동안 나주시 왕곡면·남평면·봉황면·공산면농협협동조합을 순회하며 말단직원으로 시작해 지금은 사라진 직책이지만 참사 과정 그리고 상무와 전무를 거쳐 공산농업협동조합장으로 마무리하며 정통 농업경영인의 과정을 거쳤다. 가는 곳마다 해결사 역할을 마다하지 않으며 문제를 풀어가는 그의 탁월한 소통력과 근면·성실함을 바탕으로 한 시대 흐름에 적응하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던 오 전교는 공산농업협동조합장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농협 선진화와 지역 곡물의 상품화 성공 등 지역농협발전에 공헌하며 지역농협의 선구자 역할을 다했다.

 특히, 오 전교는 재직기간 동안 과거 관료주의 타성에 젖은 피동적인 농업협동조합 풍토를 조합원을 위해 조합원에 의해 운영되는 능동적인 시스템 구축에 앞섰고, 그가 당시 추구했던 단위농업협동조합 합병은 아쉽게 시도에 그쳤지만, 후에 실행된 나주관 내 단위별 합병은 현재 나주관 내 농업협동조합의 건전한 재정 확보와 내실 있는 운영에 크게 이바지하며 명예롭게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퇴임을 했지만 오 전교에게는 잠시의 쉴 여유도 없었다. 사라져가는 어른 문화의 회복과 우리의 전통 향교 문화 복원을 기대하는 손길이 이어졌고 오 전교 역시 자신이 필요한 곳에 아낌없는 봉사와 투자에 대한 의욕도 시대의 흐름과 하늘의 뜻에 순응했다.

 오 전교가 사회봉사에 처음으로 발길을 내딛는 곳은 평소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던 나주오씨 가문에 대한 존엄한 마음가짐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는 문중의 역할과 가슴 깊은 곳 그리로 온몸에 밴 유학 정신을 바탕으로 나주향교 중흥에 역할을 다하는 책무에 무게를 두고 시간과 공간에 투자하게 된 것이다. 불굴의 도전 정신 또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오전교는 추대 후 소감에서 '추대하여 주신 위원 여러분에게 감사드리며, 앞으로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하겠다. 그리고 경쟁보다 호선의 미를 선택한 최석봉 선생님께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 나주의 미래를 담은 아름다운 표현이었고 자랑스러운 나주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추대와 함께 유림학사 발굴과 양성을 위해 ‘향교, 사마재, 존성계, 유도회’의 화합과 활성화를 통한 균형 발전과 ‘향교의 유네스코 가입’ 추진으로 ‘향교 문화의 중흥을 도모하겠다’라며 강력한 의지를 다짐했다. 오 전교의 소신과 정책 다짐은 온 나주시민과의 소통으로 이어져 나주향교의 발전과 더불어 관광 메카가 되는 기회의 시간이 기대된다. 또한, 향교의 옛 전통 보전은 물론 숭상하고 가치를 높인 전 전교님들의 공적 치하와 함께 시대에 역행하지 않는 정책 실현을 다짐하는 모습이 조화로운 나주시민의 길로 이어지길 바란다.

오 전교의 ‘인자무적의 철학’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지 않는 시대정신이 많은 사람이 공감대 형성을 통해 나주 사회 발전에 기여되는 시민 정신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감한다.

<나주토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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