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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기자명 나주토픽

교육과 전통문화를 접목시켜 향교문화 부흥을 추구하는 나주향교 김평호(80) 전교

  • 입력 2017.07.22 00:40
  • 수정 2017.07.22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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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향교, 유교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세계적 자랑거리로 구상 추진

김평호 전교

역사의 도시 나주시의 근간의 한 몫을 차지하는 나주향교가 최근 나주문화의 재생 및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중심에는 지난 2015년 5월 25대 김평호 전교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25대(2015-2017) 이어 26대(2017.5.22.) 전교를 연임하고 있는 동안 나주향교는 유서 깊은 나주향교가 문화재청의 지원사업인 ‘살아 숨 쉬는 서원·향교 활용 사업’을 필두로 경서감독, 체험학습, 서예교육, 예절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지역민들은 물론 관광객들로 하여금 친근한 향교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과정을 겪어가며 나주가 역사문화 관광도시로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과 다양한 향교문화 전파에 앞장서고 있다. 인품과 유풍을 중시하고 유학의 심오한 이치에 감동하여 경전을 읽어가며 인간의 가치관을 깨닫고 유교경전에 내재한 가치를 추구하고 그 깊은 뜻을 완미함은 물론 향교를 대한민국 대표상품으로 가꾸고자 하는 김 전교의 철학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김전교는 ‘성균관이 나주향교를 본(모델)으로 복원한 점 하나만으로도 대표 향교가 되기에 충분하지만 창건 연대도 타 향교에 비해 400여년을 앞서는 것을 물론 수학성과도 전국 으뜸이었으며, 나주향교 대성전은 국가지정 보물394호로 지정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타 향교와 비교될 수 없는 역사적 사실 등의 소중한 자산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교 김평호 옹(翁)은 전라남도 나주시 세지면 벽류정 마을에서 아버지 고(故) 김기열 선생과 어머니 이유녀 여사의 사이에 3남 1녀 중 막내로 1937년 1월 27일 태어났다. 일찍이 부친과 장형을 여의고 중형 선옥 족보명 (광호- 전 보훈처 지청장)의 각별한 우애와 지도로 대학교육을 마치고 사학에 입문하여 36세에 교감으로 발탁되어 능력을 인정받아 46세 젊은 교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명성을 높였다.

재직 중 교육에 더 큰 뜻을 품고 광주광역시교육청전문직 공채시험에 응시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성적으로 합격하여 공립으로 옮긴 후 국립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장, 시교육청 중등교육과장, 학생교육원장 등을 두루 역임하며 교육계에 크게 공헌했다. 또한 재직 중에는 남다른 과업수행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공직자의 자세로서 청(淸), 공(公), 신(愼)(청렴결백, 공정무사, 매사신중) 세 가지를 몸소 실천하고 사회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1983년 송원중학교 초임교장으로 발령 후 다음 해인 84년 광주과학고 수석을 배출하고 85년에는 전국 고등학교 연합고시에서 당시 광주·전남 전 지역에서 200점 만점 4명중에 2명을 배출한 뛰어난 교육 방침으로 학교 위상이 높이 평가 되고, 지역사회와 학부모로부터 교육력을 인정받아 지역 교육계의 선구자적 역할을 다했다.

이와 같은 공로의 업적은 국립교원대학종합교원연수원 교장자격연수과정 강사2년, 광주광역시 교육청공직자윤리위원 4년, 전 나주대학(현 고구려대학) 관선이사 4년, 광주광역시 시민감사관 2년, 광주광역시 지방교육재정계획 심의위원, 광주지방법원 가정지원 가사조정위원(現) 광주향교재단이사, 대한노인회 전라남도연합회시군지회부설 노인대학장협의회장 12년, 광고전아카데미원장(現)으로 이어졌으며 그 외에도 일백만 광산 김 씨를 대표하는 대종중 도유사의 역할, 성균관 부관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활동 속에서도 김전교의 소신과 실천철학의 존재는 평생 몸담았던 교육자의 근본 사상이 마음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현대교육과 전통문화의 접목을 통한 향교문화의 새로운 아이템 개발은 그를 더욱 빛나게 했다. 물론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교의 소신과 정책을 고수하며 끝없는 소통을 통한 참여와 기여를 강조하며 나주향교의 발전을 크게 기대하고 있다. 또한 교육은 ‘가르치는 대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보는 대로 배운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며 부모님들의 가정생활이 자녀교육의 표본이 되어 현대사회에서 일부 망가뜨려진 가정회복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유학정신의 전파와 향교문화의 부활로 올바른 사회문화를 회복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이 김전교의 철학이자 소신이고 분명한 활동 목표가 된 이유이다.

김전교는 그의 인생철학을 ‘첫째는 근면이요, 둘째는 정직입니다.’라 하며 ‘근면해야 합니다. 건강도, 실력도, 사업도, 출세도 모두가 부지런하지 않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는 뜻 깊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정직은 최선의 정책이다(Honest is the best Policy)는 격언을 되새기게 해주는 소중한 금언(金言)이다.

과거나 현재 변함없이 국가청문회 대상자들의 추한 몰골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이 간절히 바라는 인간상을 대변해주는 인생철학이기도 하다.

김전교는 불계기공(不計其功 : 공을 계산하지 않는다), 존현용중(尊賢容衆 : 어진 사람을 존중하고 대중을 포용함) 정신으로 꾸준히 나주향교의 발전을 설계하고 있다. 1392년 조선개국 당시 360여 개 이었으나 남한에 상존한 234개의 향교 중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나주향교 건설이 그의 꿈이다.

또한 김 전교는 ‘오늘날 글로벌시대에 가장 고부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나주향교는 당연히 으뜸의 문화상품으로 성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국정을 수행하는 지도자의 마인드도 중요하지만 지역사회 시민과 단체장들의 공감대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하며 그의 꿈이 이뤄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다.

<나주토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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