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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기자명 신동운

빈손에서 연매출 70억의 대표이사로 변신한 한 광우 사장

  • 입력 2014.02.1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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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오는 산바람도 즐거움을 준다는 긍정적 사고로 삶을 개척

우연한 기회에 맨손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연 70억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공한 동양콘크리트의 한 광우 사장의 눈물겨운 사연을 소개 받았다. 순간 머릿속으로 밀려오는 영감이 바로 연락을 하게 하였다. 한사코 사양하는 인터뷰 약속을 받아내어 바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만남의 시작이었다. 거친 손의 감촉, 절단된 약지 손가락 상처의 흔적들을 보여주었지만 어떤 사람에게도 찾기 힘든 따스함을 느끼게 하였다. 첫 인상은 매우 감성적이었다. ‘제가 한 광우입니다.’라는 밝은 미소의 인사에 반가움을 표시하면서 다시 한 번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허술한 옷차림과 밝은 웃음의 주인공, 주름은 좀 있었지만 선하게만 보이는 그 모습이 인간승리의 당사자로 연계하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어갔을 강한 집념이 있었을까?’하는 의심이 갔지만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보릿고개의 시절 60년대의 대한민국, 차마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던 보릿고개 시절이 바로 그것이다. 6.25전쟁 이후 피폐된 경제상황과 정치부재의 형태는 우리나라 대부분 국민들을 가난 속에서 헤어나기 힘들게 하였다. 의식주(衣食住) 중 어느 문제 하나도 풍요롭지 못했다. 한 사장도 당연히 보릿고개의 어린 시절을 겪었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도 허다했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다. 당시 반에서 1등을 하면 떡을 해오는 관습이 있었다. 한 사장이 4학년 시절 1등을 하였을 때 인근 과수원에서 떨어진 배를 주어서 학교에 가져갔었다는 옛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 15세도 채 되지 못했지만 가난 때문에 먼저 돈벌이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은 서당 앞마루 밑에서 그리고 밤이면 이불 속에서도 한자공부에 전념하였다.고난의 길 가난이 정말 싫었지만 극복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린 나이와 기술도 없는 단순 노동자의 임금은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시작은 벽돌 만드는 공장에서 심부름으로 시작하였다. 너무 힘들었기에 별의 별 생각을 다해 보았지만 다시 생각을 바로 세웠다. 성실하면 모든 고난을 극복할 수 있고 반드시 성공한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공장에서 주는 밥을 먹고 얼마 되지 않은 급료였지만 푼푼히 모았다. 술과 담배, 차는 한 사장에게는 그저 사치일 뿐이었다.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잘 먹지도 못하면서 일을 하다 보니까 코피를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을 극복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신념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었다. 작업 중 손가락이 잘렸을 때 가난을 탓하며 마음 아파하면서도 결코 울지 않았다. 모든 것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었다. 5년 후 공장을 그만두고 홀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동안 배웠던 기술을 바탕으로 제품을 만들어서 건축현장에 공급하였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바람에 날리는 시멘트가루도 아까워했다. 시간도 아까웠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다. 혹 여유시간이 생기면 오직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으로 확신했다. 88올림픽의 도움을 받아서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당시 한 사장은 ‘부는 바람도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라고 표현을 하였다.힘든 고난과 극복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 사업이 번창해 갈 무렵(1998년 10월 28일) 큰 시련이 닥쳤다. 운반차량이 사고를 낸 것이다. 당시 운전기사는 분실된 타인의 운전면허증을 위조해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사고 후 피해자가 알려준 사실이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 운전자는 중상에 무면허였고 피해차량의 대파(大破),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매일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기도했다.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피해자가 초라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한 사장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불쌍해 보였든지 해결을 위해 본인이 죄를 뒤집어 써주었으며 중상자는 거뜬히 일어났다. 지금도 그 시간들을 기적이라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다. 최고로 단단한 벽돌 생산자로 인정 한 사장의 성실함과 신뢰는 사업의 번창으로 이어졌다. 벽돌 주문량이 많아지고 홀로 제품을 생산해내는 것은 무리였다. 당시 최초로 공장을 짓고 벽돌 자동화 생산을 시작한 나 계환(현 일성기업 회장)사장의 도움으로 자동화기계를 300만원에 구입하여 대량생산을 시작하였다. 제품판매와 더불어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최강의 벽돌을 만들었고 업체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제품주문은 밀리고 일할 사람이 부족해 부인과 같이 일하며 즐거움에 빠졌다. 드디어 성공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새로운 도전의 성공과 좌절 1999년 IMF로 대한민국 전체가 시련을 겪고 있을 때 ㈜동양콘크리트를 창업하였다. 주위의 반대도 많았지만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국 최초로 2루베 최소형레미콘 1대와 대형레미콘 1대로 시작을 하였다. 한 사장의 아이디어가 제대로 적중하여 소형 레미콘작업은 3년 후 처분할 때까지 많은 수익을 올렸다. 갈수록 사업은 번창하였고 현재 대형레미콘 15대를 운영하고 있다. 사업이 번창하자 욕심이 생겨 새로운 제품개발에 투자를 하였다. 10억을 투자하여 경계석과 대리석 제품생산을 위한 공장을 신축하고 생산을 하였으나 판매가 부진하여서 공장가동을 중지하였다. 하지만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공장 재가동의 꿈을 간직하고 있다. 한때는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잠시 동안 공장 돌보기를 소홀히 하였다. 하지만 2년 전 아들의 병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삶의 방식에 대한 깊은 반성의 기회를 가졌다. 항상 변함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 것이다. 지금도 학교, 교회단체 등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아낌없이 봉사를 하고 있다. 한 사장은 70세가 되면 아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싶다는 희망을 말하며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2시간 가까이 따스하고 다정스러운 표정을 잃지 않았던 그가 신중한 모습으로 조심스레 말을 했다. 스스로의 흔적을 되새기며 ‘성실과 끝없는 열정은 누구에게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준다.’라고..... 가난했지만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후세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열정을 다했던 그가 퍽 존경스러웠다. 함께 인생을 논했던 짧은 시간의 사연들이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반드시 이정표가 되어서 성공의 길을 열어주었으면 그 이상의 기쁨이 없을 것 같다. 발행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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