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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민족 대 이동의 장관을 이루는 설 명절

  • 입력 2017.01.31 23:44
  • 수정 2020.03.1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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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아무리 신정을 강요해도 국민의 혼이 담긴 설날 우리의 명절로 여겨

민족 대 이동의 장관을 이루는 설 명절

  

국가가 아무리 신정을 강요해도 국민의 혼이 담긴 설날 우리의 명절로 여겨

  

매년 음력 1월 1일 어김없이 다가오는 설 명절이다. 설날 무렵이면 추석과 함께 ‘민족대이동’은 항상 화두가 되고 있다. 근래에는 ‘어른’들이 자녀를 찾는 역류 현상도 일고 있지만 아직은 고향을 찾는 인구가 훨씬 많다. 그래서 오늘날 설은 전통문화를 보존한다는 측면과 만남을 갖는 절대적인 시간이 된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소중하다. 

하지만 설이 언제부터 우리의 명절이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나주토픽 시민의 눈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잊혀져가는 설의 의미와 유래를 찾아보았다. 

우리나라의 설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인 기록은 7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서에 나타난다. 중국의 역사서 『수서(隋書)』와 『구당서(舊唐書)』의 신라 관련 기록에는 왕권 국가로서의 설날의 면모가 잘 나타난다. 즉 “매년 정월 원단에 서로 경하하며, 왕이 연희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는 기록은 국가 형태의 설날 관습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고려사(高麗史)』에도 설날[元正]은 상원(上元)·상사(上巳)·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중구(重九)·팔관(八關)·동지(冬至)와 함께 9대 속절(俗節)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식·단오·추석과 더불어 4대 명절의 하나였다. 『수서』와 『북사(北史)』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해마다 정초에 패수(浿水)에서 물과 돌을 서로 끼얹고 던지고 소리 지르며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편싸움, 특히 석전(石戰)의 원류로 추정될 수 있다. 정월은 삼국 모두 각별한 달로 여겼으며 신라와 가야에서는 시조 묘에 제사를 지내고 신라에서는 정월에 죄수를 사면하기도 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사금갑조(射琴匣條)에는 정월 대보름의 세시풍속과 십이지일(十二支日)의 금기 유래를 파악해 볼 수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박혁거세의 즉위일이 정월 대보름이라고 했고 김알지는 계림 나뭇가지의 황금궤에서 탄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혁거세는 박씨골매기이고 김알지는 김씨골매기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어떻든 이들은 모두 공동체의 시조신이며 창건신, 수호신이다. 오늘날 대보름을 전후하여 많이 지내는 골맥이 동제는 의례이자 세시풍속이기도 한데 그 동제의 원류를 여기서 찾기도 한다. 

조선시대는 4대 명절이라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명절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민간에서는 여전히 다양한 세시명절이 전승되고 세시풍속이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세시풍속을 수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를 비롯하여 조선 전 지역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통해서도 그 다양함을 짐작할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수록된 세시풍속이 모두 당시에 전승된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 가운데 많은 것이 현대까지 이어졌다. 그 밖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추재집(秋齋集)』·『면암집(勉菴集)』·『지봉유설(芝峰類說)』·『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해동죽지(海東竹枝)』 등의 문집에 정월을 비롯한 각 달의 세시풍속이 소개되거나 시문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와 연등회 등 불교 세시풍속이 강세를 이룬 반면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설 차례를 비롯한 조상제사가 중시되는 등 유교 세시풍속이 나름대로 힘을 발휘한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세시의례(歲時儀禮)>

설날을 비롯하여 각 세시명절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은 사실상 거의 의례에 포함되어 전통적인 의미로 말하면 ‘세시의례’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속신도 실상은 의례적인 것이어서 의례와 속신을 구별하는 데에는 모호한 점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신이나 초월적인 힘을 대상으로 제의를 행하는 것을 의례로 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모호한 것도 있으리라 본다. 세시의례는 농사를 중심축에 놓고 행해지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농경의례’라고도 한다. 의례력 속에 포함되는 모든 세시풍속이 풍농의 기원과 예축, 풍흉을 점치는 점세(占歲), 농공 내지는 풍농을 감사하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러 어업과도 관련을 갖게 된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그만큼 농사가 약화되고 농경을 위한 세시풍속도 약화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자의적이든 변화에 따르든 구별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의례로서의 구속력이 보다 강한 것을 농경의례라 한다. 세시의례 가운데서도 공동의례의 경우는 농경의례로서의 기능을 주로 한다. 설날 아침에는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차례는 종손이 중심이 되어 지내는데 4대조까지 모시고 그 이상은 시제 때 산소에서 모신다. 차례를 마치고 가까운 집안끼리 모여 성묘를 하는데 근래에는 설을 전후하여 성묘를 한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의정대신들이 임금에게 정초 하례를 드렸다. 이는 궁중의례이면서 왕에게 올리는 세배의 성격을 지닌다. 

한편 가정에서는 정초에 안택을 하여 집안의 평안을 빈다. 안택은 무당과 같은 전문적인 단골을 불러 집에서 보통 고사보다는 규모가 큰 굿을 하는 것인데 정초에 행하는 신년제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지역에 따라서는 홍수매기(횡수막이)라 하여 주부가 단골무당을 찾아가 비손을 하거나 집에 불러다가 비손 형식의 굿을 한다. 홍수매기는 홍수를 막는 의례로서 가족 가운데 그해 운수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각별하게 의례를 행한다. 홍수매기를 지낸 후에 짚으로 ‘제웅’을 만들어 뱃속에 액운이 든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종이와 돈을 넣어 삼거리나 사거리에 버린다. 이는 액운을 멀리 보낸다는 의미가 있다. 

세시풍속에서의 속신은 의례성을 지닌 것이 대부분이어서 의례와 속신의 구별이 모호한 점도 있다. 설을 전후하여 세시풍속이 다양한 만큼 속신 역시 다양하게 나타난다. 설날은 섣달그믐부터 시작된다고 할 만큼 그믐날 밤과 초하루는 직결되어 있다. 끝과 시작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나면서 동시에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날 밤에는 잠을 자지 않는다. 이를 수세(守歲)라 하는데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설날에는 세찬의 대표적인 음식인 떡국을 먹어야 나이 한 살을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떡국을 먹지 않으면 나이를 먹을 수 없다는 속설도 있다. 복을 끌어 들인다는 복조리 풍속도 속신으로 볼 수 있다.

  

<복식 및 절식>

설날에 입는 옷을 ‘설빔’이라 한다. 『경도잡지』에는 남녀가 모두 새 옷을 입는 것을 ‘세장(歲粧)’이라 했다. 『열양세시기』에는 남녀노소가 모두 새 옷 입는 것을 ‘세비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설날에 무색(물색, 색깔이 있는) 옷을 입는데 특히 어린이들은 색동저고리를 입는다. 명절뿐 아니라 돌과 같은 기념일에도 색동저고리를 입는데 돌에 남아들은 남색 띠를 두르고 여아들은 자색 띠를 둘러 구별했다.

  

<놀이방법>

설의 놀이는 이미 섣달그믐 무렵부터 시작된다. 연날리기는 섣달그믐 무렵부터 시작하여 대보름까지 즐긴다. 보름날의 연은 액연(厄鳶)이라 하여 멀리 날려 보낸다. 원래 보름날 이후에는 연을 날리지 않는다. 

그 밖에 설날 무렵 윷놀이·널뛰기·승경도놀이·돈치기 등을 한다. 윷놀이는 남녀노소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집 안에서도 하고 밖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하는 정초의 가장 보편적인 놀이다. 윷의 종류도 장작윷과 밤윷이 있고 놀이 방법도 다양하다. 윷놀이를 통해 그해 운수를 점쳐 보기도 한다. 윷놀이와 윷점에 대해서는 『경도잡지』에도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널뛰기는 여자들이 즐기는데 역시 『경도잡지』에 놀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현대의 설>

근대국가에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한 때 음력설[舊正]과 양력설[新正]로 두 개의 설이 있었다. 음력설은 전통적인 명절, 곧 설날을 의미하며, 양력설은 현재 일상력으로 사용하는 태양력에 의한 설이다. 그러나 전통명절은 역시 설날이다. 구정이나 신정이란 용어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설날이 오늘날과 같이 본명을 찾기까지는 우리의 역사만큼이나 수난을 겪었다. 광복 후 우리 스스로의 정부가 들어섰지만 설에 대해 이중과세라는 낭비성만을 강조했다. 하지만 국가가 아무리 신정을 강요해도 일반인들은 설날을 명절로 여겼다. 근래 민속박물관과 민속촌 등 유관기관에서는 민속놀이판을 벌이고 있으며, 이를 찾는 가족들도 날로 늘고 있다. 민족의 혼이 담겨있는 명절이기 때문이다.

<나주토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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