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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한글날 특집 -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운 보한재(保閑齋) 신숙주 선생

  • 입력 2016.10.18 10:57
  • 수정 2016.10.1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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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특집 -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운 보한재(保閑齋) 신숙주 선생

문화관광부는 2002년 10월의 문화인물로 조선 전기의 학자이며, 문신으로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를 지녔음은 물론 훈민정음 창제에도 큰공을 세운 신숙주 선생을 선정했다.

▲ 보한재 신숙주 영정


신숙주 선생은 1417년 6월에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고령(高靈)으로, 아버지는 공조좌참판(工曹左參判)을 지낸 장(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따님이다.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 이하 신숙주를 선생이라 함),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이다.
1417년(태종 17) 6월 13일(丁酉)에 태어난 보한재(保閑齋) 신숙주. 선생은 공부를 시작하자 모든 경서와 역사책을 한번 읽으면 기억할 정도였으며,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1438년(세종 20)에 처음으로 시(詩)와 부(賦)로 시험을 치르는 진사시험을 실시하였는데 신숙주 선생은 서울에서 단번에 으뜸을 차지했다. 또 같은 해에 생원시험에도 합격을 했으며, 이듬해인 1439년에는 문과(文科)에 합격할 정도였다. 훗날 45세라는 엄청나게 젊은 나이에 영의정까지 지냈다.
▲ 생가 앞 담벼락 안내문


조선시대 500년 동안에 뛰어난 어학자 중 한 명으로 선생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세종대왕이 기획했던 말글 정책을 충실히 보필하였으며,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에 참여하여 다른 일곱 학자와 함께 1446년(세종 28) 9월에 { 훈민정음해례본} 편찬을 완료하였다.
1445년(세종 27)에는 권 제, 정인지, 안 지 등이 지어 올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의 내용을 다른 학자들과 함께 1447년(세종 29)까지에 걸쳐 보완하였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전승된 한자음을 정리하여 표준 한자음을 만들려는 목적에서 편찬한 『동국정운』이 1447년(세종29)에 6권으로 완료되고, 1448년(세종30) 출판되었는데, 32세의 나이에 서문까지 쓸 정도로 이 편찬 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또 보한재집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문충공행장을 통해 선생이 한어(중국어), 왜어(일본어) 등 외국에 능통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이러한 능력을 통해 한글 창제 뒤 세종이 계획하고 있던 표준용 우리나라 한자음과 표준학습용 중국 본토 한자음을, 모두 새 표음문자인 한글로 표기하도록 하는 사업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443년(세종 25, 계해) 2월 21일에 부사직(副司直)이었던 선생이 통신사와 함께 서장관이 되어 10월 19일까지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와서, 당시의 견문록(見聞錄)과 일본의 인명·지명 등을 한자음으로 기록하였다.
 
▲ 신숙주 생가

이 기록을 통해 후에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가 1471년(성종 2)에 완성되었다. 특히 이 책의 ‘조빙응접기’ 항에서는 일본 사신의 응대법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여 국가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는데, 이 또한 일본어에 대한 소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생은 1458년(세조 4)에 재상(우의정)이 된 뒤에도 10여 년 동안 예조판서를 겸하여 국가 외교에 있어서도 큰 공적을 세웠다.

또한 국방에도 주력하여 1460년(세조 6, 경진) 에 동북 방면으로 자주 침입하는 중국 동북부 지방의 여진족의 토벌책을 제시하고, 동년 7월 27일에 강원·함길도 도체찰사 겸 선위사(宣慰使)로 임명 되어 북방 오진(五鎭)에 이르러 강을 건너 가 여진족을 공격하여 대첩을 거두고 개선하였다. 이에 대하여 1461년(세조 7, 신사)에 왕명으로 <북정록(北征錄)>을 저술하였다.

세종대왕 때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 제작에 참여하고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지만 세조의 편에 섰
다는 이유로 20세기 초까지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세종은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보필을 맡겼지만 그는 친구 한명회, 권람을 따라 수양대군의 편에 섰다. 이후 사림파 집권 이후 성토의 대상이 됐고, 숙주나물 등 인신공격의 대상이 됐다.그러나 국조보감, 동국통감의 편찬에 참여했고, 여진족을 물리쳤으며 일본에 가서는 일본의 지도를 그려오는 성과를 올렸다. 농업 작물기술을 적은 농산축목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자는 범옹(泛翁)이고 아호는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이다.

선생은 책을 읽으려고 집현전 숙직을 도맡아서 했다는 일화가 있을만큼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하루는 집현전 학자가 늦게까지 책을 읽다 잠들었길래 세종이 자신의 옷을 덮어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신숙주선생이었다. 이에 흡족해진 세종은 이후 훈민정음 창제에도 신숙주를 투입한다.[4] 세종은 신숙주를 높이 평가해서 아들 문종에게 "신숙주는 크게 쓸 특급 노예인물이다"라며 자주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문종이 죽자마자 세종의 시절 충성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우고 수양대군을 따른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수양대군은 단종즉위 사신으로 중국으로 가게되었는데 이때 신숙주도 동행시키려 했다. 신숙주는 여기에 따르면서 했던 말이 "장부가 어찌 아녀자의 품에서 편히 죽기를 바라겠습니까?"정작 자신은 늙어서 편안하게 죽었다.. 다만 계유정난 전후에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는 애매한 점이 많아 알 수가 없다. 계유정난때는 신숙주의 위치는 박팽년, 성삼문과 함께 언급할 정도로 큰 두각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계유정난 이후로는 완전히 수양대군의 오른팔로 활동하면서 단종의 양위를 주도하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고 자신을 도운 좌익공신 중 1등공신으로 올라서 있다. 이런 행적 때문에 사육신들도 단종복위 운동중에 한명회 권람,윤사로와 더불어 신숙주를 처단 1순위로 올려놓았다. 아예 성삼문은 신숙주만 따로 언급하면서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라고 언급한다

(세조실록 2년 6월 2일)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계획이 발각되자, 정승들과 함께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단종을 서인(庶人)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고, 이어서 단종과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후 실록의 신숙주에 대한 평가를 보면 당대나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평가가 좋지만, 후반기로 들어가면 헌종이 "신숙주는 왜 성삼문처럼 행동하지 않은 거냐"며 비판하는 장면도 있을 정도로 '변절자'라는 캐릭터로 굳어져 버렸다."성삼문 vs 신숙주" 성종대에 김종직이 "성삼문은 충신입니다"라고 하자 성종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런 김종직도 신숙주를 높이 평가해서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재집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는 15세기의 사림들은 신숙주를 그리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오늘날에도 변절자의 대명사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더욱이 세조에게 협력하고 집현전 동료인 성삼문의 처형을 주장하며 부귀영화를 누린 정인지나 나머지 집현전 선배 최항, 정창손처럼 세조의 정변을 도운 집현전 선배들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인 신숙주보다는 더욱 명확한 배신자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세간의 평가는 신숙주에게 좀더 가혹하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변절자를 까기위해 역사속의 변절자 신숙주를 가져와서 비판하는 소설 등을 써냈다. 오늘날 알려진 신숙주의 변절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남효온의 '육신전'이나 이광수의 단종애사에서 알려진 설화들에 기초한 것들이 많다

이렇듯 지조면에서 사육신인 성삼문과 비교되지만 업적은 뛰어나다. 능력과 업적만 놓고보면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명재상의 반열에 넣어도 손색이 없다. 조선의 많은 재상들 중에서 신숙주만큼 다재다능했던 인물도 드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선생은 당대에 흔치 않게 민간상업의 진흥을 지지한 인물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었다. 성종실록을 보면 화폐의 유통과 이를 위한 시장의 발전에 대해 길게 논한 장면이 나온다.

해당 기사는 성종실록 성종 4년(1473년) 2월 11일 기사 참고. 요약하면 '화폐유통을 위해서는 큰 도시나 백성의 유동성이 많은 지방에 시장을 여는 것을 허용해서 백성들의 상업활동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강제로 시키는 것보다 민심의 동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있다. 이게 별것 아닌 이야기인것 같지만 신숙주의 이 의견은 조선에서 화폐유통이 되지 않았던 원인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으며, 농업이 근본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민간상업의 진흥을 지지했다는 것은 사회 구조를 보는 눈이 달랐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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