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문화·교육
  • 기자명 나주토픽 기자

나 주 향 교( 羅 州 鄕 校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구조로 향교 건물 배치의 표본

  • 입력 2016.07.12 08:47
  • 수정 2016.07.12 08:48
  • 댓글 0

나 주 향 교( 羅 州 鄕 校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구조로 향교 건물 배치의 표본

지정종목 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 전남유형문화재 제128호
지정일 1985년 02월 25일
시대 조선
종류/분류 향교
소재지 전라남도 나주시 교동 32-1

 나주시는 983년(고려 성종 2) 전국 12목(牧) 가운데 하나가 되면서 지방 행정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전라도라는 명칭을 전주와 나주에서 그 첫 글자를 따온 사실 자체가 이를 뒷받침한다.
나주 향교는 고려 성종6년(987) 8월 12목에 향교를 설치할 때 창건되어 조선 태조 7년(1398)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나주향교는 지금의 위치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 조선초에 파주염씨 낙남조(廉順恭)가 살던 땅을 향교부지로 양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지금의 위치는 태조7년(1397)에 향교를 다시 지을 때 정해진 위치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나주시 교동에 있는 나주향교(羅州鄕校)는 창건연대나 창건 이후의 자세한 사정을 알려줄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향교 소장 기록이나 다른 기타 문서(文書)에 향교의 연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 나주향교 대성전

나주향교가 위치한 곳은 조선시대에는 나주읍성의 서문 밖이었다.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에서 뻗어 나온 장원봉 산자락이 감싸고 있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도로가 지나고 주택지가 들어서면서 옛 지형의 특색이 많이 사라졌다. 나주 향교는 대성전(大成殿)이 건축 양식상 조선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처음 창건된 이후의 중건 중수 연혁 또한 자세하지 않으나 1839년(헌종 5)에 이현호(李玄好)목사가 사림들과 협력하여 향교를 중수하였으며(<鄕校重修記>, 1839, 李玄好 記), 1869년(고종 6)에는 김병우(金炳愚) 목사에 의해 다시 성묘(聖廟)가 중수되었음이 나주향교지에 수록 (<聖廟重修記>, 1869, 金炳愚 記)되어 있다.
나주향교는 지방의 많은 향교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몇 가지 건축 특성을 가지고 있다. 먼저 건물 배치에서, 향교 영역 앞쪽에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향공간, 뒤쪽에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하였다. 또, 신문이 외신문과 내신문 두 개가 있다. 뿐만 아니라, 나주향교에는 1701년(숙종 27)에 창건한 계성사(啓聖祠)가 향교 북동쪽의 안쪽에 있었다. 계성사는 공자의 아버지 숙양흘과 공자의 네 제자인 안자, 자사, 증자, 맹자의 아버지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계성사는 나주향교를 비롯하여 서울의 성균관 문묘, 전주향교, 함평향교 등 몇 안 되는 향교에만 세워졌다. 또한, 나주향교의 명륜당은 서울 성균관의 명륜당처럼 가운데에 위치한 중당은 좌우에 연결된 익당보다 지붕이 높게 조영되었다. 이러한 건물 배치와 건축 형식은 규모와 격식에서 나주향교가 서울의 성균관에 준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향교의 입구인 외신문과 하마비(下馬碑)를 지나면 내신문이 나온다. 내신문을 들어서면 멀리 앞으로 대성전이 있고, 대성전 앞뜰 좌우에는 동무와 서무가 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외신문은 3칸 규모의 평삼문 우진각지붕이고, 내신문은 3칸 규모의 평삼문 맞배지붕 건물이다.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주심포계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제향공간의 중심 건물이다. 이 건물은 서울 문묘, 장수향교, 강릉향교와 더불어 조선시대에 조영된 대성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장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건물을 구성하는 구조체가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 중기 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이 건물은 보물 제394호로 지정되어 있다.나주향교는 다른 향교에서는 볼 수 없는 충복사란 사우가 있었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때 당시 대성전의 수복이었던 김애 남(金愛男)이 성묘(聖廟)의 위판을 안전하게 금성산으로 옮겼다 가 조용해지자 다시 대성전에 모신 공을 세우자 조정에서 김애남 을 복호(復戶)시키고 그가 죽자 충복사란 사우를 건립하여 제사 지내 주었다.
그후 사우가 오래되어 1922년 폐허되자 1924년 2월 유허비를 세워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