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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운암 조용민 선생을 찾아서나주토픽이 만난 사람 41
나주토픽 기자  |  bgt0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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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4.18  12: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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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운암 조용민 선생을 찾아서
   
 

오는 봄 길이 꽃길로 변하고 있는 참이다. 하긴 봄은 꽃으로부터 온다. 먼저 집 담벼락 매화가 하얗게 반기고 산모롱이 산수유가 노랗게 피어나고 담장너머 개나리가 방긋 웃는다. 고달픈 사람살이 세상일과 무관하게 늘 봄은 이런 꽃으로부터 온다. 한편 반갑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는 것이다.
지난 일을 헤아려보니 꽤 오래된 일이다. 우리 나주에 유명한 서예가 한분이 계셔서 그분을 찾아 서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남평읍 오계리에 진옥헌을 짓고 사는 운암 조용민 선생이다.
운암 조용민 선생은 곡성군 죽곡면이 고향이다. 1926년에 태어난 조용민 선생은 송곡 안규동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서예를 수학했다. 나이 40이 되어서야 늦깎이로 시작한 서예에 빠져 1년에 한 트럭분의 연습 종이를 내다버리도록 연습에 몰두했다.
   
 

그런데 선생의 피나는 노력보다도 당시 자동차부품 판매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3천만 원의 차용증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는 이야기에서 필자는 커다란 감동을 느꼈고 조용민 선생을 잊지 못하게 된 것이 오늘 또 진옥헌으로 발걸음을 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 버려 가업을 책임져야했던 조용민 선생이 광주에서 자동차부품 판매업을 했는데 외상으로 깔린 돈이 3천만 원 지금으로 환산하면 3억 원이 넘었다. 서예에 몰두하기 위하여 그것을 정리하고자 했는데 도무지 외상 빚이 걷히지 않았다.
그때 조용민 선생이 결심한 것이 바로 그 차용증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고 오로지 서예에만 몰두하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결행한 것이었다.
평범한 속인으로써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결행한 조용민 선생, 그만큼 서예는 선생에게는 절실한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예술혼이었을 것이다.
당시 선생은 그 까닭을 묻는 필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당시에 이미 운암(雲菴)이었고, 그 후로도 계속 운암이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요.“
자기를 자기이게 하는 그것! 그것은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위나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의 신념에 따른 길을 가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 길은 고달프고 험난한 서예가의 길이었다.
서예가의 길로 들어선 조용민 선생은 한 눈 팔지 않고 그 길만을 줄기차게 걸었다. 그리하여 64세의 늦은 나이로 동아예술제 동아미술상 수상을 하게 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때가 가장 기뻤다고 조용민 선생은 회고한다. 나이를 떠나 그침 없이 붓을 들고 한길로 정진하며 살아온 인생길에서 얻은 영광이었기에 찬사가 그치지 않았고 기쁨도 컸던 것이다.
조용민 선생은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 전라남도 광주시전 ㅁ등전 초대작가를 지냈고,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장 및 수많은 공모전의 심사위원 및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선생은 경복궁 현판, 백양사 일주문, 해인사 일주문, 도갑사 일주문, 진각국사 유적비 등 전국 각지의 굵직한 비와 현판에 수많은 글씨를 남겼다.
조용민 선생이 사는 진옥헌 집에 당도하니 사모님이 반긴다. 그런데 조용민 선생은 와병 중이었다. 올해로 91세인 조용민 선생이 지난해 5월 마당에서 넘어져 그만 병이 나 몸져눕고 말았던 것이다. 손님이 가도 알보지 못하고 누워있기만 했다.
참으로 인생은 무상한 것이었다. 서체를 연구하며 붓을 들고 글씨를 쓰던 서실은 한적한 고요에 쌓여있다.
망연한 마음으로 귀가 어두운 89세의 사모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마침 밖에 나간 따님이 돌아온다. 정성껏 차를 내온다.
어렵고 힘든 서예의 길을 걸어온 아버지 조용민 선생을 따님은 가난 속에서도 그치지 않고 정진하던 피나는 예술혼을 말한다.
밥을 먹다가도 글씨를 쓰고, 길을 가다가도 메모지를 꺼내 글씨를 쓰고,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정진하는 모습을 이야기 한다.
아들 둘에 딸 다섯, 돈이나 권력이나 지위를 쫓아 살지 않고 가난한 서예가의 길을 살아왔기에 딸들 시집보낼 때 혼수 장만은 많이 해주지 못했다. 대신 수덕(守德)이라는 두 글자 글씨를 모두에게 써 주었다고 한다.
   
 

시집가는 딸에게 아녀자로서 지켜야할 덕을 지키라는 아버지의 당부였을 것이다. 돌아가는 세상 꼴이 돈이나 지위와 권력 같은 것을 주어야 좋을 텐데 그것을 주지 못하고 대신 정신적 가르침을 주었다. 그게 곧 정신을 제일로 여기는 서예가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조용민 선생은 기술로만 글씨를 쓰는 것을 경계했다. 무엇보다도 인격도야를 강조했다.
 "평생 해도 못다 이루는 게 서예지요. 서예는 한 글자 한 획만 틀려도 그대로 그만입니다. 인생도 잘 살다가 한번 잘못하면 그대로 오명이 남고 맙니다. 그렇듯이 서예도 되돌려 다시 살 수 없는 인생처럼 다시 되돌려 쓸 수 없는 예술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자기 연마와 끝없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렇다. 한번 잘못하면 모든 게 끝이다. 그러기에 매사에 신중하고 진중하게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져버린 작금의 혼탁한 시대다.
평생을 서법 연구에 정진하며 서성으로 이름을 남긴 왕희지 선생처럼 운암 조용민 선생도 자기와의 피나는 싸움을 통해 자신만의 서법을 위한 예술혼을 불태웠던 것이다.
그러나 와병중인 선생과의 소통은 불가능했다. 돌아오는 길에 진옥헌 소나무 잎이 푸르고 매화며 봄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 있다. 봄은 오고 봄꽃은 피어나건만 마음은 봄이 아닐 때도 있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사연 많은 인생사란 것이던가? <글 청야 강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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