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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기자

나주금성관 [羅州錦城館]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

  • 입력 2016.04.18 12:14
  • 수정 2016.04.2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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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금성관 [羅州錦城館]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

팔각지붕의 320.66m²(97평) 건물로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그 규모가 가장 웅장

 금성관 전경

 금성관은 전라남도 나주시 과원동(果院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전라남 도유형문화재 제 2호다.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 일제시대에는 내부를 고쳐 청사로 사용했던 것을 1976년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주 금성관은 관찰사가 돌아다니며 업무를 보던 곳이자,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그 규모가 웅장하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단순한 객사가 아니라 왕정의 덕을 펴고 관의 위엄을 세우던 곳이어서 동헌을 능가하는 중심 건물이었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지방의 도읍지에 관아건물이 들어서면 일반적인 경우는 중심축선상에 동헌과 정문, 루문 등이 자리하고 주변에 육방관속의 건물과 내아가 위치한다. 현재 옛 나주읍성내에는 나주목사내아(內衙), 관문(官門)인 정수루(正綏樓)와 서문밖에 나주향교 등이 있다. 금성관 정문은 망화루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없어졌던 것을 2003년 복원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며,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서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하였다.

초창(初創)은 성종 6~10년(1475~1479)사이에 나주목사로 재직한 이 유인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 팔각지붕의 320.66m²(97평) 건물로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그 규모가 가장 웅장하다.일제 강점기 이후 군청 건물로 사용해오면서 원형이 파괴되어 1976년에서1977년 사이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곁에는 삼층석탑(보물50호), 사마교비, 금성토평비, 목사선정비 등의 문화재가 있다.

 

▲ 금성관 동측부지 연못지현장

금성관은 1373년(고려 공민왕 22)에 금성군의 정청(政廳)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익공집식 팔작지붕이다. 1603년(선조 36)에 크게 중수했고 1884년(고종 21)에 목사 박규동(朴圭東)이 삼창(三創)을 했으며 그후 1963년 9월에 보수, 1976년에 해체 복원공사를 시행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18본(本)의 외진주(外陣柱)와 8본의 내진주(內陣柱)를 배열하고 배흘림이 없는 곧고 훤칠한 원주(圓柱)를 세우고 주심포(柱心包)집계의 공포를 가구(架構)한 위에 외목(外目) 도리를 내어 네 귀 추녀를 떠받치게 하여 팔작지붕을 구성하였다. 공포(栱包)구조는 나주향교 대성전의 공포구조와 비슷하여 조선 중기 나주지역의 건축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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