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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기자

나주가 낳은 사회·민주운동가 광주의 어머니 소심당(素心堂) 조아라[曺亞羅 ] 여사

  • 입력 2016.02.20 09:40
  • 수정 2016.02.2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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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가 낳은 사회·민주운동가 광주의 어머니 소심당(素心堂) 조아라[曺亞羅 ] 여사

근검, 절약을 실천하며 이웃을 도우며 살아있는 상록수(常綠樹)의 역할 다해


조아라 여사는 광주의 어머니라 불리는 사회운동가, 민주운동가이다. 광주 YWCA(기독교여자청년회)에서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에 전념하였다. 1992년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열린 남북여성토론회에 한국 여성계 대표로 참석하였다. 호는 소심당(素心堂)이며, 1912년 3월 28일 전라남도 나주 반남면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조여사는 기독교 장로로서 교회와 사설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에 힘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으로 성장하였다.

1927년 광주 수피아여고에 재학 중이던 여사는 이 학교 교사로 광주YWCA를 창립한 김필례 여사를 만나 YWCA와 인연을 맺고 본격적인 항일운동 및 여성 계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광주독립학생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고 졸업 후에도 신사참배 거부 등으로 감옥살이를 되풀이했지만 여사의 확고한 애국심은 이에도 굴하지 않았고 더욱 뜨겁게 불타올랐다.
1931년 수피아여학교를 졸업 후 서서평(徐徐平)이 운영하던 이일학교(李一學校) 교사로 있던 중,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던 백인청년단사건 주동자로 연루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르고, 교직에서도 강제 해직되었다.

또한 1936년 수피아여학교가 신사참배[神社參拜]·창씨개명(創氏改名)을 거부해 폐교될 때는 동창회장이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다시 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인회를 출범시키는 한편, 독립촉성부인회 광주전남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1945년 9월 광주 YWCA(기독교여자청년회) 상무이사로 선임된 뒤, 1947년부터 1983년까지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던 광주YWCA 재건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뒤 총무에 이어 회장까지 활동하며 총 36년 동안 광주 YWCA와 여성운동·사회운동에 전념하였다.

1951년에는 전쟁 고아들을 위한 성빈여사(聖貧女舍)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3년제 야간 중학교인 호남여숙(湖南女塾)을 설립하는 한편, 계속해서 청소년 야학인 별빛학원과 소외받는 여성들을 위한 계명여사를 열기도 하였다.
또한 1962년에는 청소년 야학인 별빛학원과 윤락여성들의 직업 훈련을 위해 계명여사를 열어 이후 35년간 빈민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도우는 등 소외계층 여성들의 힘이 되어주었다. 또한 각종 상금. 축의금. 사비를 털어 광주YWCA 회관 건립 기금 등으로 내놓고 이웃들을 위해 쓰며 자신은 근검, 절약한 생활을 실천하여 살아있는 상록수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는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계엄군에 끌려가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출감한 뒤에도 부상자와 사망자 처리에 전념해 이 때부터 '민주화 운동의 대모', '광주의 어머니'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5·18 민주화운동이 수습된 후 관련 군사법정에서 조아라여사의 최후진술 중 “이 모든 사건은 저지른 사람, 만든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 또한 하나님과 역사가 기억을 하고 있으니까 언젠가 전부 드러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아무런 죄가 없고 누군가 불을 질러놨기에 그 불 끄러 들어간 사람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법은 어떻게 된 법이기에 방화범은 안 잡고 불 끄러 간 선의의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렇게 죄인 취급하는지 그것이 의아스럽다." 라는 명문(名文)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감동으로 전해지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 당시 서울 출장 중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광주 시민들을 내버려둘 수 없다"며 광주로 돌아와 심신(心身)을 아끼지 않는 활동으로 광주시민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구금된 여성들을 향해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를 외치며 모든 여성들의 애국심과 단결심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정의의 수호신이 되어 감동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또한 그녀는 여성들의 계몽과 권익을 위해 선도적 역할을 한여성 운동가이자 가난하고 의지하기 힘든 소외계층과 아픔을 함께 한 사회운동가요 광주를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고 동족을 사랑한 민주화운동가로서 대한민국에 자신의 모두를 바친 커다란 별이었고 광주의 어머니를 넘은 대한민국의 어머니로 길이 존경받아야 할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1992년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열린 남북여성토론회에 한국 여성계 대표로 참석하였고, 그 밖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사업추진회, 광주 국제사면위원회, 국민운동 전남본부, 21세기 여성발전위원회, 광주여성정치연맹 등의 고문을 지냈다. 1987년부터 2003년까지 5·18민중항쟁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하다 그 해 7월 소천(召天 :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으로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뜻함)했다.

지난 해 9월 15일 광주시 양림동에 지상 2층 341㎡ 규모로 기념관의 세워져 운영되고 있다. 옮겨진 새 터는 조 선생이 2003년 7월 소천할 때까지 10여년간 머물던 자리로 ‘광주의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정신’을 기리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1912년 3월28일 조형률 장로와 김성은 여사 사이에 3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조아라 여사의 반남면 대안리 생가는 부지 1천137㎡ 규모로 지붕만 현대식 컬러 강판으로 보수됐을 뿐 나머지 시설들은 옛 모습이 그대로 보전돼 있다. 나주인으로 태어나 광주와 대한민국의 어머니로 추앙받게 된 조여사의 업적은 나주를 크게 빛내주고 있다.
지난 2014년 나주시는 광주의 조아라 기념사업회와 협의 등을 거쳐 2017년까지 생가 복원작업을 추진하였으나 중단이 되어 많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소중한 문화자산으로 재평가를 통해 나주의 정신의 한 몫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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