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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기자

좌절과 고난을 이겨낸 외유내강의 전형적 인물 이영권 전 한우협회 나주시지부장

  • 입력 2015.09.18 16:46
  • 수정 2015.09.1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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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암 이영권 지부장
좌절과 고난을 이겨낸 외유내강의 전형적 인물 이영권 전 한우협회 나주시지부장

밥은 굶어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던 독서광 가난한 소년이 덕(德)과 부(富)의 갖춘 상징으로


나주에서 가장 인심 넉넉하고 살기 좋은 곳 중 한 곳으로 이름난 노안의 영평리에 항상 웃음으로 덕을 베풀며 따뜻한 인간미 바이러스를 멋들어지게 번져가며 살아가는 시대의 풍운아(風雲兒)가 있다. 농업 축산 부동산 등 그가 손을 대면 바로 부(富)로 이어지는 복인(福人)이다. 정치인이나 재벌도 아닐 뿐 아니라 조그만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지만 인정과 후덕(厚德)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 받는 덕인(德人)으로 알려진 전 나주한우협회 지부장 이영권(67 전 한우협회장) 사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평범한 우리 이웃이며 평생 나주를 사랑하고 나주 곁을 거의 떠나본 적이 거의 없는 정통 나주인 으로 풍요로운 미소와 깔끔한 성격 그리고 이웃사랑과 넉넉한 씀씀이는 동네 마음씨 고운 아저씨를 연상케 해주고 풍요로움을 아낌없이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24세의 젊은 이장, 다수확왕 담양봉산딸기 보급자, 복합영농의 선구자, 전국 한우협회 나주지부장 연임. 성우회장연임 한우관련해결사 등의 수식어가 항상 그의 뒤를 따라 다니고 있다. 특히 그가 대단한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만 여 권의 독서량이었다. 스스로 독서광이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뽐내고 있는 것이다.

40여 년 전 100마리의 한우를 사육했고 지금 역시 100마리의 소를 키우고 있는 이사장의 삶의 방식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의 인격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확장을 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사장은 ‘과욕은 금물이다. 꿈은 크고 생활은 소박하게!’라는 그의 생활 철학을 밝혔고 지금도 흩뜨림 하나 없다.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앞으로도 버리지 않겠다.’라는 것이 이사장의 돈에 대한 신념이었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또한 그의 정직한 생활철학은 그에게 부를 가져다주었고 자린고비 정신 아닌 배려와 사랑, 부의 공유정신은 그의 가치를 더욱 더 덧보여지게 했다.


하지만 오늘이 있기까지의 순탄대로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농촌에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부친의 제재소 투자 실패로 전답은 물론 살던 집까지 어느 한 순간 갑자기 남의 손에 넘어가고 집안이 쑥 밭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당시 가족을 가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낸 백구두의 훤칠한 멋쟁이 아버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지만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인정 많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궁핍을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시절, 어린마음이었지만 망가져버린 자존심 극복이 너무 힘들어 한 때는 자살까지 생각했었던 사건을 결코 잊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3남 1녀의 장남으로 초등학교 4학년 밖에 되지 않는 어린 아이었지만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서울로 떠나버리고 할머니 어머니 누나와 함께 손으로 가마니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되돌아오는 길 군침을 흘리면서도 붕어빵 하나를 사먹지 못했다. 식량을 사야했기 때문이었다. 가슴 아픈 시절이었다.

겨우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진학했으나 가난은 그에게 2년을 재수라는 시련을 주었다. 돈이 없어 빌린 책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을 냈었다.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모든 고통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자신감도 가졌다.
그는 독서광이었고 밥은 굶어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소년 이영권의 책 속에는 그의 희망이 잠재하고 있었다. 책은 물론 일간신문가지도 보이는 대로 모두 다 읽어버렸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그의 능력과 판단력 그리고 그만이 갖는 비전은 결코 우연이 아닌 노력의 결과였던 것이다.

어릴 적 도시락도 싸주지 못한 어머니의 아픈 마음, 도시락 같이 먹자던 친구들의 권유도 한번 응하지 않고 점심을 물로 대신하고 등하교길 자전거를 태워준다던 친구들의 권유를 거절하며 지킨 그의 자존심 등 갖가지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리며 그도 모르게 잠시 눈물 머금어본다.
특히 자존심 때문에 남의 집 일 한번 가지 않고 책 읽기에 열중하던 이사장에게 바쁜 시간에도 불구하고 밥상을 차려주며 점심을 챙겨주던 앞집 아줌마의 고마운 배려를 잊지 못하고 있다. 훗날 돌아가신 아주머니를 위해 묘지 주변에 잔디를 심어 늦게나마 보답을 했지만 아직도 고마움 잊지 않고 있다.

그 후 서울로 올라가신 아버지의 송금으로 마련한 전답과 가족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재산은 조금 씩 늘어났고 조그만 사물하나도 소홀함 없이 꼼꼼히 챙기는 빈틈없는 이사장의 사고력과 부단한 노력 그리고 냉철한 판단·결단력은 각 방면에서 다수확 왕 우수 복합영농가로 알려지고 어김없이 부(富)를 가져다주었다.

지금은 항상 부인임연순(62)여사의 걱정뿐이다. 부인에게 소밥 주는 일도 시키지 않는 애처가이면서도 ‘일을 만들어 평생 쉬지 않는다.’하는 등 부인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으면서도 ‘사랑과 근면함 그리고 내조’ 등의 부인 자랑은 몇 배로 현답(賢答)을 말한다.
24살 결혼하여 후 2남 1녀의 사회적 성공, 온갖 역경을 딛고 지역을 대표하는 농축산인 으로서 전국에 명성을 날린 거목으로 성장한 자신에 대한 자부심 또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는 후배들에게 특별한 교훈보다 󰡐현실을 직시하라. 미래를 바로보고 실천하라!󰡑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비전이 갖춘 안목과 식견으로 현실에 맞추어 적응할 수 있는 구성원이 되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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