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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광주서중·경복고를 거친 덕망과 학식을 고루 갖춘 거인(巨人) 김덕영(76)회장

  • 입력 2015.08.06 17:19
  • 수정 2015.08.0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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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토픽이 만난 사람

광주서중·경복고를 거친 덕망과 학식을 고루 갖춘 거인(巨人) 김덕영(76)회장

▲ 김덕영 회장

지역 스포츠계의 대부, 축산농가 활로개척과 건설업을 두루 거친 훌륭한 인재이자 지역 어르신
기나긴 이천여 년의 나주역사가 제대로 빛을 발휘하지 못한 채 한 많은 아쉬움을 안고 있는 이 시대에 최근 도시재생의 명목으로 도시개발이 추진이 되고 있어 성공으로 이어지기를 모두 기원하며 모두가 긍지를 갖는 문화시민으로 자리잡아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주 시민들은 나주가 갈등구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회 문화를 못내 아쉬워하고 있는, 역사 속 흐름 내내 조정역할을 제대로 해주는 참된 어른들이 없어져 버렸다는 점을 강력히 지적하고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의미를 되새기고 미래가 존재하는 사회를 기대하며 소중한 어른들의 문화를 다시 찾아보자는 의미에서 아직도 이 지역 어른으로서 자존심(自存心)을 지키며 옳고 그름을 지적해주셨던 김덕영(76)회장을 찾아 어른 문화를 살리는 동기부여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로 하자.

과거 나주 부자 중의 한 사람이자 생전에 살아있는 부처로 널리 알려진 고 김동수 씨 2남인 김덕영 씨는 나주시 서내동 62-1번지에서 출생하여 명문 광주서중과 서울의 경복고를 거쳐 건국대학교와 전남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여 일찍이 나주의 질서를 바르게 잡아주는 어른의 기초를 닦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냥 부잣집 아들로 부모의 혜택을 받아 순탄한 성장과 성공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짧은 순간 가세(家勢)의 기울임 속에서 고난의 순간을 극복하는 과정이 있었다.
김 회장이 대학을 졸업할 즈음 갑자기 가세(家勢)가 기울어지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5.16쿠데타의 발생으로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각종 규제로 힘들어진 부친 소유의 3개 주조장, 절친한 지인의 학교경영(현 중, 영산고)의 경영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금성여객(훗날 금호고속에 병합됨)의 운영권 기부 등으로 자금의 압박을 받고 심한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이때 걸출한 스타 김덕영 회장이 등장했다. 김 회장은 가세를 다시 세우기 위해 남달리 각오를 다지며 사회 첫걸음의 도전을 시도하고자 했지만 사실 막막했었다. 그가 가진 것은 단지 빈 두 손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열정뿐이었다. 한 가지 더하자면 걸림돌이 되는 그가 가진 자존심이었다.

구본식품의 구본빵과 한국요구르트, 해태제과의 사업도전과 성공 그리고 번창은 젊은 김덕영의 능력 발휘의 기회를 주었고 기울어져가는 가세를 다시금 세우게 되었다. 김 회장이 몸소 겪었고 극복했던 고난의 순간들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오직 그의 가족들과 절친 만이 알고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L모 전의원은 김 회장에게 ‘너의 집 그 많은 재산이 다 어디로 가버렸냐?’하고 물을 정도로 당시 상황은 매우 힙들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김 회장의 미소 머금은 모습에서 비록 잠시였지만 그의 주름마저도 사라질 정도로 자랑스러움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는 ‘내가 성공가도를 걸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소중하고도 절친한 나의 인맥이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광주서중과 서울 경복 고등학교를 졸업한 엘리트(élite) 김 회장이었다. 그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지인들이 서로 다투어 사업기회를 부여해 준 것이다.
조건 없는 지원이었다. 심지어 당시 구하기 어려운 화물 트럭까지 지원해 주었다. 지원의 단 한 가지 이유는 ‘김 회장에 대한 무한신뢰(無限信賴)’였다. 그들의 선택은 어김없이 맞아 떨어졌다. 당시 관련 상품 판매망은 나주를 비롯한 영암 함평을 비롯해 진도까지 목포를 제외한 서남부지역의 대부분에 착실히 구축이 되었고 상품이 없어서 못 팔정도로 지역별 분할될 때까지 사업은 번창했다. 성공으로 지인들에게 보답한 것이었다.

그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1978-9년에는 축산업과 중장비사업 및 골재채취 산업에도 투자를 해서 성공을 했다.
특히 그는 축산업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그의 사업추진 배경에는 나주 농민이 잘살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했고 축산 농가들에게 힘을 보태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를 위해 김 회장은 나주양돈협회 창설과 함께 힘 있는 축산농가의 길을 터준 것이었고 지금에 와서도 각 축산 단체들은 그들의 주장관철과 더불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는 단순한 사업가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훌륭한 인품과 덕망으로 나주 사랑에 앞장 선 것이다. 나주청년회를 창립하여 나주를 위해서 일하는 청년문화 창조에 길을 터 지자체로에 시민문화형성의 근본적 틀을 만들었다.
특히 나주체육회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지난 1981년부터 2002년 까지 20여 년 동안 나주시체육회 상임부회장과 지역축구협회장 ,전라남도 체육회 이사를 역임하면서 제26회·제31회 전라남도민체전 나주유치와 성공적 개최, 종합사격장과 벨로드롬 경기장 나주유치와 전국 규모 대회 유치에 앞장섰으며 지역 체육계의 원로로서 지역 체육발전을 통해 나주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제15회 나주시민의상 대상자로 선정되어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

 광주유니버시아드 여자축구시상 장면

지역봉사에 또한 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었다. 각종 행사에 주어지는 그의 금일봉은 지금 그 누구도 흉내조차도 낼 수 없는 나주 사랑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의 인격 속에는 배움의 깊이와 사랑이 있었고 지역의 어르신으로써 존경받을 가치와 자격이 충분했었다. 혹자는 '나주에서 유일하게 어른 노릇을 하신분이다.'라고 단언한다.
후배사랑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김회장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모 후배가 사업자금 융자를 부탁하자 며칠 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지원해줬다. 얼마 후 알고 보니 그 자금은 본인이 직접 나주 모 금융기관에서 융자를 받아 지원해준 것이었다. 후배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드렸고 사업 성공으로 보답했다는 일화다.
하지만 김 회장의 인생 속에는 영광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통일주최 국민회의 1대, 2대 대의원을 연임으로 김 회장의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달도 남기지 않는 상태에서 현대·기아자동차 절친한 친구 정몽구회장(경복고 동문)의 간곡한 권유와 가장 존경하는 왕회장님과의 의리로 출마한 김 회장의 낙선과 M건설의 사업실패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아픔을 안겨주었다. 나주에 현대 관련 공장유치의 꿈과 그의 부(富)는 일장춘몽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많은 지인들이 그를 떠나버렸지만 그의 가족들은 끝까지 믿고 사랑을 버리지 않았다.
김 회장이 청년시절 겪었던 아픔을 그의 덕망(德望)이라는 이름의 후원으로 그의 아들 김용선 사장이 재기를 해 부친의 명성회복을 위해 열정을 쏟고 있다. 사업실패 후 재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김 회장 자신이 그랬듯이 그의 아들 또한 기적과 같은 재기의 성공으로 마침내 가문의 영광을 굳게 지킨 것이다.
김 회장은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을 지켜준 1남 3녀와 가족들, 특히 다시 태어나도 만나고 싶은 정숙자(73)여사의 깊은 사랑에 감사드리며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멈추게 한다.
그리고 김 회장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에 적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어떤 고난이 닥쳐도 그 일을 맡아서 해야 한다.’라는 사회 정의(正意)와 봉사를 후배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이는 비틀어져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공감과 개선을 후배들에 당부하는 지역 어른으로서 참다운 모습을 꾸준히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주토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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