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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기자

나주목사 내아(內衙) 금학헌(琴鶴軒)

  • 입력 2015.07.02 11:33
  • 수정 2015.07.02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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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원의 북
 
명 칭 : 나주목사내아(羅州牧使內衙)
문화재 종별 : 전라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32호
(나주시 지정 문화재 현황에 향교와 함께 사적483호로 기록)
지정년도 : 1986년 9월 29일
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시 금계동 33-1

나주목사 내아(內衙)는 조선시대 목사가 정무(政務)를 보던 동헌(東軒)의 근처에 있던 살림집이다. 따라서 건물의 구조는 살림채이기 때문에 주로 상류주택의 안채와 같은 평면을 이루게 된다. 성내에 남아있던 많은 관아 건축 중에서 객사(客舍)인 금성관과 아문(衙門)인 정수루 등과 함께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물이다.
내아의 건립연대는 안채 상량문에 순조25년(1825년) 7월 1일 주초를 놓고 7월 20일 상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문간채는 고종 29년(1892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19세기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된 것으로 여겨지나 정확한 연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명확히 알 수 없다.건물의 위치는 옛 동헌의 정문이었던 정수루(正綏樓)에서 서쪽으로 약 65m 되는 지점에 정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건물의 구성은 현재 본채와 문간채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문간채를 본채와 20m의 거리를 두고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ㄷ자형 평면으로 된 팔작집이다. 중앙은 전퇴를 둔 5칸으로 좌측으로부터 대청 3칸과 방2칸 순으로 꾸며졌다

목사내아는 조선 시대 나주목사의 살림집으로, 나주읍성 안에 있던 관아건축물 중 객사(客舍)인 금성관, 아문(衙門)인 정수릉 등과 함께 지금까지 남아 있다. 건물은 일반적인 내아(內衙)의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ㄷ자형으로 된 팔작지붕 구조이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군수의 관사로 사용하면서 원래의 형태를 많이 잃어버렸으나, 최근 완전 해체한 후 복원한 목사내아는 조선 시대 관아 건축의 원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2009년 5월 숙박체험이 가능한 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거듭난 목사내아 금학헌(琴鶴軒 :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자 하는 선비의 지조가 깃든 집)은 <1박2일>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며, 전라남도에서 문화재를 활용한 우수 모범사례로 선정되기도 했다. 목사내아 금학헌에는 역대 나주목사 중 특히 존경을 받았던 유석증(兪昔曾)목사와 김성일(金誠一)목사의 이름을 딴 방이 있어 하룻밤 숙박체험으로 “나주목사의 기(氣)”를 받아갈 수 있다는 풍문으로 찾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 주변에는 금성관을 비롯한 나주읍성권의 문화유산과 곰탕의 거리가 있어 멋과 맛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목사(牧使)”란 고려 시대에는 “지방 행정단위의 하나인 목(牧)에 파견했던 지방관”을 뜻하며, 조선 시대에는 “관찰사 밑에서 지방의 목(牧)을 다스리던 정삼품의 외직(外職)문관”을 뜻한다.
목(牧)은 큰 도(道)와 전략적 요충지에 두었는데, 고려 시대의 나주처럼 왕실과 관계가 있는 지방은 작더라도 목으로 승격시켰으며 목사는 신라 때의 군주(軍主)와 그 직위가 같으며, 병원(兵權)을 가진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고려 때는 전국 12목에 목사를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경기도에 3명, 충청도에 4명, 경상도에 3명, 전라도에 4명, 황해도에 2명, 강원도에 1명, 함경도에 1명, 평안도에 2명 등 모두 20명의 목사를 두었다. 관찰사 밑의 수령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지위였던 목사의 주된 업무로는 관할 지역의 농업 장려, 호구(戶口)확보, 공부(貢賦 : 나라에 바치는 물건과 세금)징수, 교육 진흥, 송사(訟事)처결(處決)등이었으며, 진관체제(鎭管體制 : 조선 시대에 두었던 지방방위조직)가 실시되면서 진관의 책임자인 첨절제사(僉節制使)의 군직을 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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