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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교육
  • 기자명 빛가람타임스 기자

우리나라 괘불가운데 제작연대(광해군시대)가 가장 빠른 보물

  • 입력 2015.01.15 16:34
  • 수정 2015.01.2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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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읍 죽림사에 보관/당대에 제작된 불상들의 얼굴과 흡사

 
 괘불은 부처를 내어 건다는 뜻이며 아울러 괘불재(掛佛齎)라 하면 부처를 밖에 내어 걸고 야외에서 불교행사를 베품을 뜻한다. 야외법회를 할 수 있는 불화를 통칭 괘불이라 한다. 죽림사 괘불이 보관되어 있는 괘불함(길이 229cm, 너비 23cm, 높이 21.5cm)은 은행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하였는데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 괘불은 화기가 있는 아래쪽부터 한지(韓紙)와 광목을 이용하여 둘둘 말아서 괘불함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전체 형식은 대좌, 불신, 광배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단 바탕에 채색되었으며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가모니 단독상이다. 좌상의 불신은 키(곡식을 까부르는 도구)모양의 광배를 배경으로 오색구름에 휩싸여 있다. 이러한 형식의 광배는 우리나라 괘불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형식이다.
상호는 원만상이며 육계가 뾰쪽하고 머리의 중간에 가늘고 긴 중간계주가 뚜렷하다. 아래로 쭉 쳐진 귀는 얼굴에 비하여 아주 크고, 짧은 목과 어깨는 경직된 느낌이며 지나치게 단정한 자세로 당대에 제작된 불상들의 얼굴과 흡사하다.
 왼손은 무릎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오른쪽 손이 고려초기의 월출산 마애불처럼 유난히 길게 늘어져 있고 손이 지나치게 커서 비례가 잘 맞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보며 그린 구도이다. 법의는 통견형인데 오른쪽은 팔굽까지 걸친 형식이다.
 법의의 붉은 가사는 큼직큼직한 꽃무늬로 장식하여 간략하게 처리된 반면, 신광에 그린 호화스러운 금색 연속 보상화문은 고려불화를 연상케 하는 양식이다.
하단 중앙에 가로 48cm, 세로 15.5cm 크기의 화기란이 있는데,「天啓三年壬戌十日月十七日…庭中掛佛世尊幀…」의 기록이 있어 제작연대를 알 수 있다.
천계 3년은 1623년이지만 간지가 임술년으로 되어 있어 1622년 11월 27일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연호간지에 이어서 봉안처가 명기되어 있었으나 지운 뒤‘竹林寺’라 다시 묵기하고 있다. 괘불의 명칭은 세존탱(世尊幀)이며 괘불을 그린 사람은 화사 수인(首印)과 신헌(信軒)이다.
 이 괘불은 현재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 괘불 가운데 제작연대가 가장 빠른 것으로 알려진 만큼 크기와 형식에서 고식을 띠고 있으며, 작가(수인·신헌)와 명칭(세존탱)이 화기에 분명히 적히고, 독존좌불(獨尊坐佛)형식에 원만 단아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죽림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8교구 본사 백양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죽림사 사적(事蹟)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 경진년(서기 440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종죽암(宗竹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다른 기록인 죽림사기(竹林寺記)에도 죽림사의 창건연대가 눌지왕 경진년(서기 440년)으로 되어 있다.1983년 극락보전 수리 때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 160과와 청동불두가 발견되어 죽림사는 적어도 통일신라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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