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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 기자명 빛가람타임스 기자

동·서양의 예술세계를 넘나드는 나주의 영원한 팔방미인 청운(靑雲) 이학동(李學童) 화백(畵伯)

  • 입력 2015.01.03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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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고도 목사고을 예향 나주에서 예술을 논하는 자리가 마련되면 어김없이 9순의 팔방미인 청운 이학동(李學童 91세) 화백(畵伯)이 거론되곤 한다. 그는 나주를 대표할 수 있는 화단의 거목으로 동서양의 미술세계를 오가는 화가이자 연극인이며 연주자로서도 결코 프로에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대학을 졸업한 후 1948년 여수중학교를 시작으로 고흥중, 동강중학교 교감으로 정년퇴임 시까지 무려 37년 간 미술교사로서 교직생활을 통한 후학양성에 온 정열을 다 바쳤다.

또한 이른 시기인 1962년 무렵에 나주문화원 및 나주예술인동호회를 설립하는 등 나주예술단체의 기틀을 세우고 선도하여 지대한 공을 세우셨으며 여러 해 전시회를 통해서 그의 작품세계를 알리는 둥 내외적으로 지역 후배들에게 크게 귀감이 되는 역사를 이루어왔다.
아흔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2013년 5월에는 ‘문화사랑방’을 열어 악기 연주의 교육과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하여 지역 노인들의 즐거운 여가생활을 위해서 앞장서 봉사하는 모습은 그 누구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이다.
조선대학교 미술과에서 의제 허백련을 비롯해 오지호와 김보현교수로부터 서양화 및 한국화를 넘나들며 폭넓게 교육을 받은 후, 미술교사로서 37년을 넘어 지금까지 30여 회 이상의 전시회를 열며 아직도 왕성한 작품 활동에 열정을 다하고 있다.

또한 무궁화 화가로 널리 알려진 나주 토박이 이신 이 화백은 1924년생(91세)이다. 하지만 깔끔하고 건강하며 늘 밝은 모습은 9순의 나이임에도 8순의 나이를 연상케 하여 놀라움을 주기도 하지만 이 화백의 오랜 세월 다양한 예술 활동을 비추어 볼 때 단 한 차례의 수상경력 밖에 없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화백의 언행과 그의 품격 속에는 정치도 없었고 어떤 비굴함도 찾을 수 없는 순수함 그대로였으며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그의 맑은 영혼에 반해 버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성북동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직장생활을 오가면서도 줄곧 나주를 떠나본 적이 없는 토박이 이 화백은 조선대학교(1회) 미대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 미술연구소를 수료한 서양화가이자 교육자이다. 37년의 교육생활 중에는 일본 동경미술협회의 초청으로 미술전에 출품도 하였고 한국 전통예술 대상 초대작가로도 활동을 하였다. 서울과 대전 등 각지에서 개인전만 30회를 열 정도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지금은 문인화가로 더 이름을 알려지면서 우리의 꽃 무궁화를 소재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30년 전 이 화백은 서양화(유화)를 그리면서 물감을 살 돈이 없어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서양화보다 동양화를 선호하던 시절이었고 상대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재료비용이 훨씬 적게 들기 때문에 시작한 것이 동양화로의 전향동기였다. 동양화를 시작하면서 무언가 의미가 있는 작품활동을 원했었고 그 대상은 바로 무궁화였다. 나라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화백의 강한 의지표현으로도 나타낼 수 있는 믿음과 함께 무궁화 사랑이 시작된 것이었다.

모름지기 무궁화만의 소재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그다지 쉽지는 않았지만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민족을 생각하는 정열로 무궁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무궁화를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끝이 없었고 소재의 빈곤함 속에도 한반도 전체를 수놓은 무궁화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다양한 작품들로 이 화백의 진면목을 들어내어 명성을 확대해 나갔지만 대부분 예술인이 그러하듯이 이 화백의 생활 또한 윤택하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화백의 무궁화는 날이 갈수록 세월의 경륜이 묻어나고 힘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기가 나무랄 데가 없어 주위의 많은 전문가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 화백은 1962년 나주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도 나주의 문화창달을 꿈꾸며 예술인들의 동호회격인 연예인협회 창설을 주도했고 미술, 음악, 문학. 연극 등 문화예술인들 7-80명이 모여 활동을 주도함으로써 나주가 예향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는 얘기도 전해오고 있다.
이 화백은 교육에 대한 열정 또한 대단했다. 갖가지 사유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청소년들을 위해 BBC야간 중학교를 설립해서 어린 청소년들에게 공부의 기회를 주었다. 박봉의 월급과 재능기부만으로 운영했었고 국가에서 중학교 의무교육 시작으로 마감될 때까지의 야간 중학교 7년 생활이 지금껏 자랑스러워하며 그리워하고 있다.

지금 이 화백은 노인 복지과에서 한글 강사, 나주향교 명륜 전통 문화강좌에서는 문인화 강습지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화사랑방’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그의 남은 여생의 자그마한 꿈은 그가 손수 가꾸어온 ‘문화사랑방’에서 돈이 없어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 중 누구든지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 섹소폰 등을 배우고 연주하며 삶의 질을 높여 가는 것이다.
20평 조금 부족한 ‘문화사랑방’에는 피아노, 색소폰, 기타, 클라리넷, 오카리나, 아코디언이 한 쪽에는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로 장식한 벽의 그림들이 나주의 문화와 예술을 이끌어갈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12월이 되면 나주예총 주최로 열리는 무궁화 작품 전시회(약 50점)를 준비하며 매년 똑 같은 고충을 겪고 있으면서도 나라사랑과 지역사랑을 전수해나갈 후학들을 기대하며 열정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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