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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기자명 빛가람타임스

빛가람타임스가 만난사람(3)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후보 만하(卍霞) 박정자 선생

  • 입력 2013.12.26 13:58
  • 수정 2013.12.26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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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문학관설립의 꿈 버리지 못해, 11권의 저서가 후학의 길잡이 역할에 뿌듯함 느껴

 
가끔 나주의 경현동 저수지 주위를 산책하다 보면, 뿌옇고 자욱한 안개 속을 걷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볼 수 있었다. 회색 빛 승복처럼 보여지는 외투를 걸치고 조심스럽게 걷는 모습은 마치 신선이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바로 몇 년 전 박정자 선생님의 모습이셨다.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잠적하셨다. 중요문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후보인 박정자(74) 선생님이 잠적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1년 후 다시 나타나 나주문화예술화관에서 열네 번째 전통 불화전을 가졌다. 

한 동안 세상을 앞서 간 임이 원망스럽고 세상이 보기도 싫었고 그림도 싫어졌다. 마음의 여유를 찾아 간 곳은 경기도 용인의 아들 집이었다. 잠시의 여유를 찾는 듯한 생활이었다. 60여 권 이상의 많은 책을 읽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영혼 속에 잠겨있는 불화의 그늘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다리고 계시는 부처님의 품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삶의 존재가치를 느끼신 것이다. 다시 돌아오시게 된 동기였다.

장흥에서 태어나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나주와의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다시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아 반남초등학교와 중앙초등학교를 마지막으로 8년 동안 교직생활을 하셨다. 나주에서 사업을 하는 부군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처녀 선생님 시절 좋아하는 총각들이 너무 많아 거절했던 내용들을 글로 적어보자면 책을 내실 정도라 웃으시며 말해 주셨다.

 어린 학생시절부터 그림 그리기에 재능을 보여 주위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기도 했었다. 미술시간에 친구에게 그려주었던 그림 점수가 박정자 선생님의 그림 점수보다 더 많이 나왔었다는 일화도 소개해 주었다. 하지만 무엇인가 가슴속에 채워지지 않는 것 때문에 외로움을 달랠 수 없었다. 외로움들을 그림으로 승화시켰다. 교직생활 8년 동안 수업을 하면서 그림을 통해 아이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노력을 했었다. 채색을 하면 더욱 좋은 효과를 나타낸 다는 말도 강조하였다. 요즈음 교육현장에서 적극 권장하는 시청각 교육이었다.

 본인 스스로의 그림 공부도 평소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동양화, 서양화도 가리지 않았다. 나름대로의 멋이 있었다. 그림 그리는 것 자체가 생활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항상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었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1971년 드디어 선생님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 생겼다. 영혼이 갈구하던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이었다. 서울 모 백화점에서 열린 불화전시회 관람을 하면서 한 치의 여유와 공간도 허용하지 않는 자신의 세계를 만난 것이었다. 지금까지 부족함으로 느껴왔던 여유와 공간의 미학의 세계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느낌을 가졌었다.’ 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시작도 쉽지 않았다. 여자라는 이유로 만봉 이치호 스님께서는 ‘1년 후에 찾아 오시오.’ 하면서 회피하셨다. ‘기나긴 세월의 투자가 필요한데 어이 견딜 수가 있겠오?’ 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으셨다.

그러나, 박정자 선생님의 열정은을 꺾을 수는 없었다. 봉원사의 이치호 스님에게 3일이 멀다 않고 찾아다니며 무릎을 꿇고 제자로 받아 주실 것을 간청하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불화에 입문을 하게 된 것이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바닥에 엎드려 불화를 그리는 것은 정말 힘이 들었다.

그러나 행복한 마음으로 불화를 그렸다. 항상 지켜보아 주시는 부처님의 자애로운 미소가 선생님의 영혼을 다듬어 주시는 것을 느꼈었다. 부처님의 사랑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파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주시고 계신 것을 느끼셨다. 시간이 가는 줄도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1983년 대한민국 불교미술대상전 입상을 비롯해 1986년 제10회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수상을 하였다. 그리고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후보로 지정되었다. 평생 후보라는 단어를 붙이고 다니게 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심사과정에서의 불이익으로 억울해하시는 표정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많은 수상경력과 저서도 남겼다. 자신의 불화를 전국의 사찰에 봉헌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불화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였고, 자신의 저서 11권이 후학들에게 불화의 길잡이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아직 못다 한 것이 있다. 불화박물관의 설립의 꿈이다. 한 때는 나인수 전 나주시장의 후원으로 설립 단계까지 갔었다. 하지만 새로운 나주시장이 선출됨으로써 박물관의 설립의 꿈은 허물어져 버렸다. 불화만을 위한 것이 아닌 나주문화와 시민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역할을 한다며 설득을 했었다. 번번이 의견은 묵살되었다. 수년이 지나버린 지금은 마음의 상처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불화전시관이라도 설립되었으면 좋겠다.’하는 바램으로 마음마저도 허물어져 있다.

불화가 인생의 모두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오는 동안 가장 어려웠던 점을 물었다. 전혀 생각지 않은 한 마디로 간단히 말씀을 해주셨다. ‘불화 그리기 45년 동안을 그냥 숨 쉬는 것처럼 살아왔다. 어려움이 하나도 없었다.’ ‘혼이 곁들여진 예술 활동을 했었다.’ 라는 말이었다.

후학 양성과 불화를 그리다 죽는 예술인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100세 시대에 할 일도 너무 많은데 벌써 무슨 죽음을 논하느냐는 필자의 말에 넌지시 웃음으로 화답하였다.

 불화 45년 생활을 회상하며 지금도 시어머님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3남 1녀를 키우면서 불화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시어머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식 없이 말씀해 주었다. 시어머님의 존재가 없었다면 박정자 선생의 활동이 불가능했었다는 아름다운 회상이었다.

 마지막으로 후학 양성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수익성이 없는 이유로 불화 작가 지망생이 갈수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많은 재료비와 불화 속의 공간을 한 치의 빠짐도 없이 채워야하는 공력에 비해 대가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의 공통적인 고민이 아닌가 싶다.

많은 제자들 중에 임정미 교수를 수제자라고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 그리고 수제자가 불화문화를 더욱 꽃피워 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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