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칼럼
  • 기자명 나주토픽

나이 들어 보니...

  • 입력 2023.10.14 00:52
  • 댓글 1

나이 들어 보니...

 

  아침에 떴던 태양이 서산마루에 걸리면서 그렇게도 넘기 싫어 망설이는 황혼의 그 빛을 1분 30초(모슬포 앞 바다 태양이 해안선에 걸려 완전히 바다 속으로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임) 바라보면서 어제까지의 내 인생을 또 오늘에서 내일로 보내지 않으려 몸부림치지만 그렇게도 많은 세월이 그러하였듯이 그저 어김없이 가버리는 황혼인생의 마음은 무언가 모를 회한만이 가득하다고 한 것은 진솔한 심정이 아닐까?

2년에 한 번씩 있는 국가건강검진에서 키가 4cm 줄어들었음을 알고 나니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보듬으며 시달려온 몸뚱이가 가여워짐에 서글퍼지는 쓴웃음으로 간호사에게 던지는 농담 사이로 슬픈 아쉬움이 깔려 있음은 연륜의 억울함이 아닐까?

아침저녁 많은 알약들을 물로 삼키면서 과연 이 많은 약들이 저마다의 기능을 하지 못하지는 않을까 염려되면서도 이것을 먹지 않으면 그마저도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의 아쉬운 미련 때문만은 아닐까?

샤워 후 벽에 붙은 빛바랜 거울에 비친 얼굴에서 희미하게나마 보여지는 기미와 주름살은 수 많은 날들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와버린 생의 끝자락에서, 시들어가는 삶일지라도 그래도 붙잡아야 된다고 하는 가녀린 심정이 토해내는 한 가닥 희망에서 나오는 슬픈 한숨의 표현은 아닐까?

새벽에 눈을 뜨면서 오늘도 살아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어날 때 이제껏 버티어주던 골격들의 마디에서 나는 ‘뚝’소리로 통증을 느끼면서, 몸 사리지 않고 일하면서도 항상 튼튼할 줄로만 알고 땀 흘렸던 몸뚱이가 이제는 일어나는 것마저도 벅참을 알고 나면서부터 혹시라도 하는 스치고 지나가는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은 아닐까?

젊었을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한발짝 더 다가온 검은 그림자가 칠순을 넘기면서 부쩍 가슴을 옥죄어 올 때, 나는 비록 없지만 그래도 지구는 돌아 다음 날 아침 태양으로 어김없이 떠오를텐데, 남아있는 사람들은 무어라 말하며, 어떻게 기억할지가 궁금해지는 것은 인생이 남길 여백은 아닐까?

이미 와 버린 삶의 무게를 스스로 내려놓아야 하는 이 긴박한 현실과 삶을 갈망하고픈 가여운 희망과의 괴리에서, 주어진 남은 시간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일가를 고민하는 것도 마지막 그 순간까지 해야 하는 생존의 의무임은 아닐까? 아무것도 남김 없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자연의 섭리에서 누군가를 위하여 내가 내어 줄 수 있는 쓸모 있을 조직과 장기를 주겠다고 약속을 해 놓으며, 간혹 지갑에서 끄집어 내는 운전면허증 아래에 적힌 ‘장기·조직기증’이 눈에 띄면, 어쩐지 마음이 뿌듯해 지며 ‘참 잘했구나’ 함은, 주위의 상당히 많은 다른 이와 마음과 같아지는 인지상정은 아닐까?

마지막 남은 것으로 하나를 내어주고자 할 때 가족은 반대할 것 같아 동의도 구하지 않고 혼자 처리하고 감추어 오다 한참 후에 아내에게 그 얘기를 하자 ‘갈기갈기 찢겨져 불구덩이 속에 던져진 건 딸 “하나”로 끝내고 싶다’라고 하면서 극구 반대도 있지만, 그래도 수의학이지만 의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언젠가는 쓸모없어 내팽개쳐버릴 육신이 그 누구를 위하는 조그만 바탕석이 될 ‘시신기증’을 한 것은, 올 때는 내 의지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갈 때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라도 주고픈 가녀린 욕심은 아닐까?

철강왕 카네기는 자기의 묘비명에 ‘나보다도 더 훌륭한 사람을 부릴 수 있었던 사람 여기에 잠들다’라고 적었다지만, ‘생각은 있었으나 행동하지 못한 사람 여기 묻히다’라고 적으려 함은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서 생각한 것들이 정작 거기에 미치지 못함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쓴웃음을 지어야 했던 것은 자신없던 아쉬움은 아닐까?

죽음 5분 전이면서 보임이 있고 생각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후회와 미련과 미안함을 눈물로 표현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모든 걸 감추고 말 것인가?는 ‘웃으며 죽음을 맞겠다’는 평소의 소신을 어떻게라도 지켜보려는 진지함은 아닐까?

이제 와 생각하니 미워함이 미워함에 상처를 줌이 아니라 내가 더 괴로워짐에 순간 부질없음 알고 먼저 용서하니 마음이 먼저 매우 홀가분함을 무소유라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어떠한 사유라도 누워 일어나더라도 행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산소 마스크를 떼어달라 말하니, ‘가족이면 어찌 하겠느냐?’ 하기에 보건소에 ‘연명치료거부’를 등록하고 나더니, 이로서 이승으로 갈 준비를 마친 것은 아닐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