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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나주가 낳은 시대의 풍운아 인권변호사 맏형 범하(凡下) 고(故) 이 돈 명 변호사

  • 입력 2023.09.27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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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토픽이 만난 사람 <184>

나주가 낳은 시대의 풍운아 인권변호사 맏형 범하(凡下) () 이 돈 명 변호사

약자들의 변론을 맡아 인권변호사의 대부로 추앙받고 있는 의인

 

 

  지난해 윤석열 정부가 출발하면서 노동탄압이라는 구시대의 용어가 재등장하며 정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실제로 정부도 노동계는 노사문제를 두고 대화와 타협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서로 양보의 기색없이 마찰이 이어지고 있다. 시대가 변한 만큼 노사가 충돌없이 원만한 타협을 통해 경제발전에 기여해 주기를 바라지만 강(强) 대 강(强)의 자체를 누그려뜨리지 않은 것은 물론 시위 강행과 강력 진압이라는 용어도 자주 등장하며 다수 국민을 불안에 떨게하고  있다.  

이에따는 불안을 우려하며 과거 군사독재에서나 거론될 수 있는 인권문제가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오지 않기를 기대하며 과거 시민의 인권을 위해 공헌하신 이돈명 변호사 재조명을 요청하는 독자의 요구에 따라 본지 81호의 내용을 재구성하고 추가해 글을 올려본다. 

고(故) 이돈명(李敦明, 1922년 8월 21일 ~ 2011년 1월 11일)은 대한민국의 판사 출신 법조인이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의인(義人)이자 걸인(傑人)인 고(故) 범하(凡下) 이돈명[李敦明] 변호사(이하 이 변호사)는 나주가 낳은 이 시대의 풍운아로 억울한 이들의 벗으로 살다 이승으로 떠난 의인이다. 억눌린 자들의 인권을 떠받들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살았던  정의로운 평화의 사도  이 변호사는 세상 한복판에서 예언자의 시각으로 세상의 변혁을 위해 일한 시대의 풍운아였다

이 변호사는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의 물꼬를 튼 시국사건들을 도맡아 변호하면서 인권변호사의 맏형 역할을 했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 독학으로 공부하다 1950년 조선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1952년 고등고시 사법과(제3회)에 합격하였다. 판사를 거쳐 1963년부터 민사사건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74년 52세의 나이에 유신독재 시절의 대표적 조작사건인 민청학련사건을 맡은 황인철·홍성우 변호사에게 찾아가 변론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면서부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이후 시국사건의 단골 변호사가 되었다. 

또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김지하 반공법 위반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 광주민주화운동 등 1970년대 이후 주요 시국사건에서 빠지지 않고 활약하며 황인철·조준희·홍성우와 함께 '4인방 인권변호사'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인권변호사로 처음 법정에 선 것은 1975년 김지하 시인의 반공법 위반이었다. 

이후 3·1 민주구국선언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리영희·백낙청 교수 반공법 위반사건, 동일방직·원풍모방 사건, 송기숙 등의 긴급조치 9호 위반사건,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 통일혁명당 재건사건, YH 무역농성 사건, 10·26 사건의 김재규 변호, 전민학련·전민노련사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서울대 프락치사건, 대우자동차 파업사건, 미문화원 점거 농성사건, 권인숙씨 성고문 사건 등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주요 시국사건의 변론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대부로 칭해졌다. 

당시 사법부는 그가 맡은 대부분의 시국사건에서 유죄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유죄변호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1986년에는 5·3 인천 노동자시위와 관련하여 수배 중이던 당시 민통련 사무차장 이부영을 숨겨줬다는 협의를 받고 실제 은닉자였던 후배 고영구 변호사를 대신하여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고영구의 노모와 와병 중이던 부인이 받을 충격을 염려해 자신이 숨겨준 것으로 거짓으로 자백한 결과로 범인(凡人)으로서는 감히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의로운 행동이었다.

1986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전신인 최초의 인권변호사 모임 정의실천법조인 회(정법회)를 조직하였다. 1988년부터 4년간 조선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며 학내 개혁을 이끌었고, 1987년 한겨레신문 초대 비상임이사가 되었다. 이후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초대회장(1992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고문(1994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1995~1996),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1988년), 민족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2001~2003), 상지대학교 관선 이사장(2002), 민주항쟁 계승사업회 공동대표(2003) 등을 역임하였다.     

1986년 한승헌·홍성우·조영래 등 인권 변호의 취지에 공감하는 인사들과 함께 정의실현법조인회(정법회)를 결성했고, 이 모임은 이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전신이 되었다.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인권위원장(1982)을 역임했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고문(1988), 조선대학교 총장(1988~92), 한겨레신문 상임이사(1989~99),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1995),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2001~03), 상지학원 이사장(2002), 천주교 인권위원회 이사장(2006) 등으로 활동했다. 1998년 제50회 세계인권선언기념일에 국민훈장무궁화장을, 2002년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수여하는 명덕상을 수상했다.

이 변호사는 대학 총장으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을 비롯한 교육계 그리고 동문의 적극적인 추천과 지원으로 제8대 조선대학교 총장 재임 중 대학의 제반 제도를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정비하고 사학의 틀을 바꾸는 혁신을 기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사학의 고질적 병폐를 개선하며, 대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위한 교육시설과 환경의 개선, 연구수준의 향상, 면학 풍토 등 각 분야 지원을 통해 연구수준과 교육수준의 질적 향상을 도모했다. 또한, 재직 당시 설립 정신을 되살려 계승 발전시키고 구 경영진에 의해 수십여 년간 파행적이고 비민주적으로 운영되어 온 대학의 각종 제도를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바로잡는 등 명실상부한 민족·민주대학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으로 사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변호사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오롯이 헌신했던 거인으로 견디기 힘든 모든 역경을 이겨내며 억울하고 힘없는 이들의 변론을 맡아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살았던 의인(義人)이자 사표(師表)였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그를 기리기 위해 2011년 1월 작고한 이후 2012년 부터 이돈명인권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이 시대의 인권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이나 단체에 수여하기 위해 제정한 상으로 2023년 12회 상을 수상하였다. 이돈명 변호사가 남긴 인권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인권의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 목적을 둔 이돈명 인권상은 매년 1월에 시상하며 상금은 500만원이다.

그가 남긴 나주인의 사랑과 의(義), 그리고 옹골진 기개가 더 널리 전파되고 더 훌륭한 후학들이 배출되고 그의 의로운 희생정신은 나주의 영원한 자부심으로 남기를 기대해 보는 것은 물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개가 후세에도 널리 퍼지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감한다.                                         <나주토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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