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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주토픽이 만난사람
  • 기자명 나주토픽

임진왜란의 명장(名將) 최희량(崔希亮) 장군

  • 입력 2023.08.13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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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토픽이 만난 사람 <183>

임진왜란의 명장(名將) 최희량(崔希亮) 장군

문무겸비한 조선의 무신 희귀한 자료로 평가되는 임란첩보서목 남겨

                                                       임란첩보서목(任亂捷報書目)

  2013년 나주토픽이 창간 이후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지 나주시민과 성공한 기업인 그리고 역사적 인물을 추천받아 인터뷰 또는 자료를 찾아 소개의 글을 올리고 있다.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183명의 글을 올렸다. 이 글을 올리는 동안 나주인들이 항상 나주의 인물 자랑을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지역을 떠난 나주인 그리고 다수 시민으로부터 8면의 문화재 소개와 자랑스러운 나주인 소개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받아왔다. 당연한 언론의 책무에 감사받기에는 무리였지만 자부심과 보람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나주시 그리고 관계 기관들이 '자랑스러운 문화자원과 인물 관리에 너무 소홀하지 않은가?'라는 의문점을 갖기도 하며 보도를 통해 관심을 유도했지만 예산 부족을 내세우는 나주시나 관련 사업단체들의 무관심으로 개선 자체가 역부족이었다.

한 예로 한글 창제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보한재 신숙주 선생 묘는 경기도기념물 88호로 잘 관리되며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태어난 나주시는 뜻깊은 생가마저도 관광자원으로 관리하기에 초라할 정도로 방치되고 있어 비난을 받고 있다. 걸출한 인물의 고장이라 자랑하기에 부끄러운 면목이다.

시와 관련 단체들을 향해 간절한 마음으로 개선을 촉구해 보며 꾸준한 언론의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해 본다.

본지 218호에는 나주 출신 인물에 관심을 가진 구독자가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최희량 장군(이하 최 장군)이 나주인임을 알지 못했다'라며 소개를 요청해 자료를 찾아 올려본다.

                                                     무숙사 충의문
                                                     무숙사 충의문

  ▶ 임진왜란의 명장 최희량 장군

  최희량은 1560년(명종 15년)에 태어나 1651년에 세상을 뜬 인물로, 본관은 수성(隋城)이며, 자는 경명(景明), 호는 일옹(逸翁)·와룡(臥龍)이며,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나주시 다시면 초동에서 아버지 최낙궁(崔樂窮)과 어머니 광산 김씨(光山 金氏) 사이에서 5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7살부터 수학하였으며, 2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그만둘 때까지 무관으로 살았다.

최희량의 집안은 그의 대에 이르러 문반과 무반에 걸쳐 고루 입신한 이들이 많았는데, 부친이 자손들에게 학문과 무예를 동시 수학한 결과로 보인다.

특히, 최희량은 장대한 신체를 지녔던 까닭에 일찍이 부친의 명으로 문과를 그만두고 활쏘기를 비롯한 무예를 배웠다고 전한다.

27세 되던 1586년(선조 19년)에 알성과의 무과에서 장원급제한 최희량은 이후 33세인 임진년에 왜란을 당하였으나, 부친의 삼년상을 치르느라 여막에 있었다. 그의 무관으로의 일생에 있어 중요할 때는 정유재란이 발발한 1597년이었다. 이 해에 최희량은 어전에서 적장 풍신수길(豊臣秀吉)을 그려 놓은 표적에 화살을 적중시켜 선조로부터 홍양 현감을 제수받았다.

그리고 이때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가 용맹스럽게 왜적과 싸웠는데, 특히 명도(鳴島), 예교(曳橋)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여 공훈을 세웠다. 또 적에게 포로가 된 신덕희(申德希) 외 700여 명을 생환시키기도 하였다.

  ▶ 임란첩보서목(任亂捷報書目)

  그의 일생에서 기장 빛나는 시기였다. 지금까지도 최희량이 왜적을 맞이하여 승리한 기록인 보장이 문집에 실려 전해지고 있으며, 독립된 문건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이 문건은 현지에서 작성한 전과 보고서로, 그 여백에 상관이 회답을 적어 보내는 형태의 당시 공문서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첩보서 목'은 선조 31년(1598) 임진왜란 당시 흥양현감으로 있으면서 당시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 관찰사에게 왜적을 격파한 전과를 보고한 문서로 첫 번째, 최희량 임란첩보는 첩장으로 19절이며 표지에는 '최일옹파왜보첩원본'이라 묵서로 쓰여 있다. 1598년(선조 31) 3월부터 7월 사이에 최희량이 흥양현감으로 재임하면서 전라좌도수군절도사, 통제사 등에게 첨산·고도 등의 승첩을 7차에 걸쳐 올렸다.

두 번째, 교지는 낱장으로 되어 있으며 총 9장이다. 5장은 선조 때 최희량이 받은 것이고, 1장은 최희량이 죽은 뒤 내린 병조판서 교지이며, 1장은 고종 때 내린 교지이며, 2장은 그의 아내에게 내린 교지이다.

세 번째, 시호망은 3장으로 1871년(고종 8) 시기 문서이다.

또한 왜적들과 싸워 승전을 거둔 경위를 담고 있어 다른 기록에는 있지 않은 귀중한 사실이 여기에서 새로이 밝혀져 있다. 따라서 당시 공문서의 양식과 임란 관련 사실을 살필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자료로 평가되어 보물 제660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현재 국립나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최희량의 생애에서 큰 전환점은 이순신의 죽음이었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순절하자, 그는 관직을 버리고 향리인 나주로 돌아온다. 이후 세상을 뜨기까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관직에 일체 나가지 않고 나주의 대박산 아래에 비은정(費隱亭)을 짓고서 나운(羅雲) 임연, 백호(白湖) 임제(林悌), 송호(松湖) 백진남(白振南) 등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일생을 보냈다.

최희량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5년(선조 38년)에 선무원종 일등공신(宣武原從 一等功臣)에 책봉되었다. 당시의 공신록권을 보면, 이들에게는 일등급을 가자(加資)하고 자손들은 음직을 받게 하며 부모에게는 관작을 봉해 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희량은 죽을 때까지 이러한 포상을 받지 못했으며, 자손들에게도 그 혜택이 미치지 못하였다.

최희량이 세상을 뜬 지 124년 후인 1774년(영조 50년)에 대신들이 경연에서 주청한 일로 인해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1800년에 고장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충무공께 제사를 올리면서 공을 배향하였다.

  ▶ 문무를 겸비 장군 일옹문집 남겨

  최희량은 무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시와 문에 능하였다. 더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뒤 50여 년의 세월을 시문으로 자락(自樂)하였으니, 그가 남긴 글의 양이 매우 많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들은 상당수가 상실되었고, 그의 문집인 『일옹문집(逸論文集)』에 남아 있는 글은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현재 최희량의 일옹문집은 초간본과 중간본이 남아 있다. 초간본 문집은 그의 5대손인 제동(齊東)이 유고를 수습하여 장헌주(張憲周)의 수교(수校)를 거쳐 1846년에 2권 1책으로 간행한 것으로, 규장각,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중간본 문집은 그의 10세손인 우현(禹鉉)이 초간본에 빠져 있는 최희량 관련 기록을 수습하여 1934년 나주에서 역시 2권 1책으로 간행한 것으로, 국립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초간본과 중간본 중 현재 많이 유포된 것은 초간본으로, 한국고전번역원의 문집총간(속총간 11)에 들어 있는 「일용문집』도 이 초간본이다. 때문에 본 번역서의 저본으로 이 초간본을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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