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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최고의 침의(鍼醫) '침구경험방' 저자 명의 허임(許任)

  • 입력 2023.05.22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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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최고의 침의(鍼醫) '침구경험방' 저자 명의 허임(許任)

천민에서 어의까지 오른 천재

침술가 동의보감 허준과 함께 명성을 날린 조선 중기의 한의사

 조선시대 당대 최고의 침구(鍼灸) 명의(名醫) 허임(許任)은 나주에서 태어났지만 임진왜란 때 석 달 가까이 머물었던 충남 공주에서 말년에 저서 '침구경험방'을 집필하고 생을 마쳤다. 공주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며 관광자료로 활용하고 있지만 태생지 나주에는 아무 기록도 남겨있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2018년 나주시가 그의 생애를 재조명을 통해 신숙주-최부-나대용 등을 잇는 지역 출신 새로운 역사 인물 발굴에 관심을 가지며 허임의 역사적 가치를 부여와 함께 ‘나주의 조선 역사 인물’ 1명을 추가하며 나주인으로써 빛을 보게 되었다. ‘조선 침·뜸의 으뜸’이라 불린 허임의 삶과 업적이 오랜 망각과 외면의 세월을 넘어 출생지인 나주에서도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를 기념해 본지 180호에 올린 침의 허임을 보강 재조명하며 글을 올려 본다.

당시 자료에 의하면, 허임은 조선 14대 왕 선조부터 인조(16대)에 이르기까지 어의를 지냈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기술을 기록으로 남긴 ‘침구경험방’ 편찬을 통해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침구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전하며. 동의보감을 집필한 허준과 동시대를 살아온 인물로, 특히 전남 나주의 천민(노비) 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허임이 강원도 양양 출신 또는 ‘출생 시기와 출생지는 알 수 없다’라는 전언도 있으나 그의 출생지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전언 되고 있다. 실록에는 선조 35년(1602년) ‘임의로 내침의 허임이 시골로 물러가 있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광해군 2년(1610년)에는 ‘침의 허임이 전라도 나주 집에 가 있다’라고 명시돼 있어 나주 연고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는 허임이 자랑스러운 나주의 인물임을 증명해주고 있는 사실로 그의 발자취를 찾아 기록해본다.

▶ 명의의 탄생

한의학대사전 자료에 의하면 허임은 우리나라 침구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이름난 의학자로 전남 나주 노비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부모의 병 때문에 의사의 집에 가서 잡일을 하면서부터 의술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침구술을 익히는 데 특별한 힘을 기울였다. 그의 침구술은 점차 국내외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비천한 신분의 가정으로 이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시의(侍醫)로까지 등용되었다. 그는 의료활동을 시작한 초기부터 이론과 실천을 결합해야 의학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1644년에는 자신의 오랜 의료활동 경험을 종합하여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을 편찬하였다. 허임의 7대조는 세종 대의 명재상이었던 '송골매' 허조(許稠)로 알려져 있으며 허씨 가문이 단종 복위 운동과 연루되어 신분이 강등 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침구학의 기초 이론과 우수한 치료 경험들을 종합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의학책들에 잘못 쓰인 침혈들의 위치와 침혈잡는 방법들을 바로 잡고 치료 효과가 높은 새 침형들을 찾아서 밝혀놓았다. 그리고 새롭고 독특한 침구보사법(鍼灸補瀉法)들을 내놓았다.

아버지 허억봉은 전남 나주 악공 출신의 악사(樂師)로서 장악원 전악까지 승진했으며, 당대 최고의 피리 연주자였다. 또 거문고 연주도 잘하고 학춤도 잘 추었다. 부모로부터 미천한 신분과 뛰어난 재능을 함께 물려받은 허임은 임진왜란이라는 변수로 인해 침의(鍼醫)로서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으며, 침술을 통해 신분의 한계까지 극복할 수 있었다.

허임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침의로 활동했으며, 임진왜란 기에는 당시 왕세자로 전란 극복을 진두지휘하던 광해군을 모시고 다니면서 광해군의 인후증, 편두통 등을 치료하기 위해 수시로 침(鍼)을 놓았다. 여러 해에 걸친 왜란으로 인해 약재가 부족하고 전란의 부상자가 속출해 외과적 진료가 절실히 요구된 시기에 침의인 허임의 활약상은 두드러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임진왜란 소강기인 1596년에는 종6품의 치종교수(治腫敎授)까지 올랐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내침의(內鍼醫)가 되어 국왕 선조에게도 침을 놓았다. 특히 1604년(선조 37) 9월 23일에는 한밤중에 선조가 평소 앓던 편두통이 갑자기 발작해 침을 맞는 자리에서 어의(御醫) 허준(許浚)의 추천으로 침을 놓았고, 그 공로로 품계가 당상관까지 올랐다. 이후에도 허임은 십여 차례 선조에게 침을 놓았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허임은 영평 현령, 부평 도호부사, 남양 도호부사 등 외직에 나가 있으면서도 수시로 궐에 들어와 침을 놓았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위성공신 3등에 녹훈되어 ‘갈충진성 위성공신 가선대부 하흥군(竭忠盡誠衛聖功臣嘉善大夫河興君)’이 되었다. 광해군의 총애가 높아지자 양반 관료들에게 질시의 대상이 되어 끊임없이 탄핵을 받았으며, 실록에는 그의 미천한 출신을 폄하하는 사관의 사론(史論)도 여러 차례 실렸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자 허임도 남양 도호부사에서 파직되고 위성공신 호도 10년 만에 삭훈되었다. 하지만 그의 침술은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으므로 그를 쫓아낸 인조마저 수시로 허임을 불러 침을 맞았고 효과를 보자 상을 내렸다. 그리고 정사원종공신으로 녹훈까지 하였다. 노년에는 임진왜란 때 석 달 가까이 머문 충남 공주에 정착해 살았다. 이곳에서 평생의 임상경험을 집약한『침구경험방』을 펴냈으며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세상을 떴다. 조선시대 공주의 부전동(浮田洞) 마을인 충남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에는 허임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허임의 제자로서 공주에서 올라와 내의원 침의로 활동했던 최우량(崔宇量, 1599~1671)의 후손들도 함께 살고 있다.

▶ 저술 활동 및 추모

허임이 노년에 저술한 『침구경험방』은 1644년(인조 22)에 전라도 감영에서 목판본으로 처음 간행되었다.

당시 내의원 제조 이경석은 이 책의 발문에서 “태의(太醫) 허임은 평소 신의 의술로 일컬어졌고 평생 치료한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가 없다. 그중에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낸 경우도 많아 일세에 명성을 떨쳤으며 침의들에는 으뜸으로 추앙되었다.

지금 이 경험방은 귀로 듣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손으로 시험해 본 것이다. 분명치 않은 것은 분명하게 하고, 번거로운 것은 요약했으며, 틀린 것은 바로잡았다. 질병의 원인과 치료의 중요한 묘방이 한번 책을 열면 곧바로 눈앞에 선명하니 간략하면서도 쉽게 요약되어 상세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후 『침구경험방』은 여러 차례 간행되었고 언해본까지 나왔다. 일본에도 전해져 17세기 초에 이미 일본 판본으로 간행되었고, 중국에서도 청나라 말기부터 이 책의 내용이 포함된 『침구집성』이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1800년대 말에는 청나라에서 '침구집성'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그 내용이 허임의 침구경험방을 거의 표절했을 정도이다. 동양 삼국에서 모두 인정받는 침술이었던 것이다.

허임의 침구경험방은 허준의 동의보감과 함께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백성 속으로 걸어 들어간 나주 출신의 명의에 대한 재조명을 통한 재탄생으로 소중한 문화유산이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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