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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주토픽이 만난사람
  • 기자명 나주토픽

한국 웨딩업계의 전설 대경인텔리젼트 양명영 회장

  • 입력 2023.04.01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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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웨딩업계의 전설 대경인텔리젼트 양명영 회장

고향·후배 사랑 각별, '웨딩사관학교 교장' 애칭과 함께 웨딩업계 장악한 영원한 거목

 

                                                                       양명영 회장

  과거 한양과 닮았다고 해서 소경(小京)이라 불렸던 나주시는 북쪽에는 금성산 그리고 남쪽에는 영산강이 유유히 흐르며 호남 고도의 중심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고려 성종 14년인 995년에 병마절도사가 들어서면서 전라도의 핵심 도시로 성장한 나주시는 ' 천년 목사고을'이라는 명칭을 얻게 됨은 물론 수많은 인물 배출로 정·경·관계 등 각계각층 국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해왔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 호남 푸대접의 환경에서 경제계 거목으로 성장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 박인천(작고, 다시면) 전 회장과 전남대 출신으로 우리나라 증권업계를 이끌었던 한국 경제계의 큰 인물 양재봉(작고ㆍ나주읍ㆍ목포상고ㆍ전남대ㆍ전남대 명예박사) 전 대신그룹 및 대신증권 명예회장 그리고 일본 이천그룹 설립자 금하(錦下) 서상록(徐相錄 봉황면) 회장이 손꼽히는 존경받은 인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양재봉 회장과 서상록 회장은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대를 이어 후학 양성에 도움을 주고 있다. 뒤를 이은 나주 출신 경제계 거목들 또한 왕성한 활동과 함께 지역 발전과 후학양성을 위해 물심양면 아끼지 않는 후원으로 존경받고 있다.

나주시민을 향해 희망을 심어주고 자부심을 갖게 해 준 인사들을 향해 존경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전해드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본지 211호에서는 나주 출신 경제인 대경인텔리젼트 양명영(봉황면 출신 이하 양 회장) 을 찾아 글을 올려본다.

 ▶ 웨딩사업계 빛난 나주 출신 기업인들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나주 출신 현역 경제인 가운데는 웨딩업계 진출이 두드러졌다. 배경을 살펴보니 '웨딩사관학교 교장 선생님'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양 회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2013년대 당시 웨딩업계 2세대 선두주자' '웨딩사관학교 교장 선생님'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양명영(봉황면ㆍ성균관대 경영대학원) 노블레스웨딩컨벤션 회장 겸 한국예식업협회장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양 회장은 18세에 무작정 상경해 맨주먹으로 웨딩업계 대부로 성장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1983년부터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신궁전예식장을 시작으로 예식업계에 뛰어들어 현재 노블레스와 베라체컨벤션, Y타워컨벤션, AW컨벤션(종로ㆍ안산), SD웨딩 등 전국 20여 곳에서 예식장을 운영해왔다.

양회장의 고향 사랑은 후배들에게 또 다른 생활 터전을 마련해주게 된 것이다. 많은 고향 선후배들을 예식사업에 불러들여,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 양 회장은 2013년부터 한국예식업협회장을 맡았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등 다양한 활동으로 명성을 높였고 지금은 대경인텔리젼트 회장으로 폭넓은 활동으로 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 무작정 상경한 청소년의 성공가도

  양 회장은 만 17세 되던 1968년 여름 날 가뭄이 몹시 심하게 들어 일자리 조차 찾기 힘들었던 시절 아무런 생각도 없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도망치듯 고향을 빠져나왔다. 그야말로 무작정 상경한 것이다.

반겨줄 이 없는 막연한 서울에 시작은 중식당의 종업원 생활로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발걸음을 내딛었던 직장인 싸구려 먹거리 시장은 훗날 대한민국 최고 웨딩사업가로 성장의 기회를 터준 도약의 밑바탕이 되었다. 양회장은 부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17세 청소년 양회장은 항상 욕심을 부리기에 앞서 꾸준히 노력하고 미래를 설계할 줄 아는 특별한 능력을 갖춘 능력가였고, 그의 흔적을 찾아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 1,500원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3년 만기 2만 원짜리 적금을 들며 미래를 꿈꾸었다.’ 그리고 '중식당을 전전하면서 무섭게 돈을 벌었다'라는 등의 기억 속에 담긴 그의 집착은 단순한 엄포가 아닌 부자가 되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있었고, '하루 16시간, 365일 일했다'라는 노력 속에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집념으로 무장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건강 악화와 귀향 그리고 재상경 등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가 도전했던 식당경영의 성공과 함께 웨딩업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예식장과는 1983년 첫 인연을 맺게 되었다. 지인의 소개로 신설동 신궁전예식장을 경영하게 되었고 사업 번창에 따라 대림동 대림예식장, 암사동 사랑예식장 등 일사천리 사업을 확장해가게 되었고 10여 년 이 된 2013년 그가 소유하고 있거나 경영에 참여한 예식장은 노블레스와 베라체컨벤션, Y타워컨벤션, AW컨벤션(종로·안산), SD웨딩 등 전국 20여 곳으로 웨딩사업계 대부로 알려졌다. 영예스런 ‘웨딩인재사관학교 교장’이라는 애칭도 얻게 되었다.

양회장은 그의 웨딩업계에서의 성공 포인트는 '고객 바람에 부합하는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 것이 적중했다'라고 말한다. 모든 사업장은 고급화나 중저가, 외식업 특화 등 지역 또는 소비자 성향에 따라 선택하고, 선택전문경영인체제를 도입해 책임 경영방식으로 운영해 성공 가도를 걷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성공 가도를 걷는 과정에 우여곡절도 많았다. 창업 초기엔 '돈을 가마니에 쓸어 담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벌었다. 그러나 IMF 금융위기 직전 신규 진입이 늘면서 예식업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양회장의 특별한 기지를 발휘해 무리한 차입경영보다는 내실 경영에 치중해 위험부담을 줄이고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었다.

  ▶ 양회장의 각별한 고향 사랑 덕담으로 전해져

  17세 청소년의 무작정 상경 그리고 사업가로 성공을 끌어낸 양 회장의 웨딩사업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고향 사랑과 후배 사랑의 손길은 끊기질 않았다. 현지 후배인 곽도근씨는 언제든지 '고향에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오면 거절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양회장의 독특한 고향 사랑을 전한다.

특히, 많은 고향 선후배들을 예식장 사업에 불러들여,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 바탕에는 '고향사랑'과 ‘신뢰’가 넓고 깊게 깔려있다. 양회장은 모 언론사를 통해 '사실 80~90년대까지만 해도 예식장은 완전 현금장사였어요. 서로 믿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아무래도 고향 후배나 지인들을 많이 찾지 않았겠어요. 독립한 후배들의 성공 소식을 들었을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라고 밝히며 만약 예식장 경영 컨설팅 비용을 받았다면 더 큰 부자가 됐을 거라며 양 회장은 은근한 자랑을 하곤 했다.

1952년생 만 17세에 무작정 상경한 빈털터리가 대한민국 최고의 웨딩 사업가로 인정받고 있는 양회장이지만 그는 항상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시간과 돈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참일꾼이었다. 투자한 만큼 반드시 결과도 얻어내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1991년 성균관대에서 경영대학원을 마쳤다. 2003년에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2012년 박근혜 후보 중앙선거대책위 부위원장, 2013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을 비롯해 한국예식업협회 회장 등의 활동과 함께 자랑스러운 나주인으로도 명성을 날렸다. 한걸음 더 나아가 고향의 후배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역사가 더욱 확산하여 나주 도약에 보탬이 되기를 기원하며 글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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