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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나주토픽

꿈을 버려라! 그것이 아니라면 ...

  • 입력 2022.09.09 04:20
  • 수정 2022.09.09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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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버려라! 그것이 아니라면 ...

 

  우리는 우연히 만난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대화를 하다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으냐?’ 하고 물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짧고 굵게 살고 싶다’라고 대답한다.

이 말은 세계에서 돈을 제일 많이 벌고 싶다든가? 아니면 경국지색 서시같은 미인을 얻어 살고 싶다든가? 또 아니면 유명 정치인이 되어 세계를 거느리고 싶다든가? 하는 무언가 큰일을 하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 가늘고 길게 살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욕심없이 주어진 환경에 철저하게 적응하면서 최선을 다하여 남을 욕하지 않고 남에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보통사람으로서 평범하게 살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나는 자연인이다’에서의 삶처럼...

그렇다면 이 두 삶에 대하여 어느 쪽이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오늘 역사는 오늘을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건, 오늘도 세상에서 주목을 받는 사람이건, 똑같은 시간에서 똑같은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종이 위에 쓰여지느냐?, 아니면 돌 위에 새겨지느냐? 아니라면 그저 가족의 기억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냐 하는 차이일 뿐이다.

  수양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친조카인 단종을 몰아내었을 때 그런 그에게는 죽는 날까지 흔들림 없는 의(義)와 도(道)를 지킨 충신들이 있었으니, 그들을 바로 사육신과 생육신이라 한다. 사육신(死六臣)은 한마디로 단종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충신들로,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가 바로 여섯 명의 충신이며, 사육신이 절개로 생명을 바쳤다면, 생육신(生六臣)은 살아서 싸운 사람들이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더 이상 세상에 뜻이 없다며 벼슬을 버리고 단종을 추모하면서 절개를 지킨 여섯 명의 충신으로,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이 그들이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조선 최대의 비극이었던 삼전도에서의 인조의 굴욕이 있기까지, 청군에게 항복을 하자는 주화파와 모두가 죽더라도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로 다투기 시작했다. 예조판서 김상헌(1570∼1652)이 척화파의 대표요, 이조판서 최명길(1586∼1647)이 주화파의 대표였다. 청군에 항복하여 목숨이라도 구하자는 주화파의 입장은 의리상으로는 분명히 궁색했다. 척화파 쪽에서는 최명길에게 ‘매국노’니, ‘만고소인’이니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막말을 퍼부었지만, 아무리 비굴한 일이라도 모두 죽는 것보다는 일단 살아나고 봐야 한다는 절박한 주장 또한 물리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로 명쾌한 이론으로 시비를 가려내는 일은 참으로 어렵던 시절이었다. 청나라 숭덕제에게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서 삼전도의 치욕으로 삼전도에 청나라 임금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가 세워졌고 조선은 세기의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자 척화파들은 모두 청국의 심양으로 끌려가는데, 늙은 신하 김상헌은 조국을 떠나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세월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라는 시조를 남겼더라. 여기서 우리는 사육신과 척화파는 짧고 굵게 살고자 하는 인생이고, 생육신과 주화파는 가늘고 굵게 산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학창시절 선생님들로부터 “Boys! Be ambitious!(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를 많이 들었다. 이는 젊은이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주기 위해서 자주 인용되었던 구절이기도 하다

꿈을 꾸는 것은 자유지만, 꿈을 품을 때 욕심도 함께 품어지게 되는 것이리니 꿈은 크게 갖되 욕심을 이길 수 있을 때만 그 꿈을 품어라. 그런데 많은 정치인들이 그러하지 못하더라.

성경 야고보서 1장 15절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악을 낳고, 죄악이 장성한즉 죽음을 낳느니라’ 하였다. 짧고 굵게 살 것인가? 아니면 가늘고 길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자기를 속이지 않는 욕심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서 그 시시비비가 가려질 것이며, 욕심에는 양비(兩非)나 양시(兩是)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의를 보는 욕심있는 삶이거나, 무심의 욕심없는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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