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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배 설(裵楔), 조선을 구하다

  • 입력 2022.08.08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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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설(裵楔), 조선을 구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배설장군은 과연 우리가 아는 그런 인물인가?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今臣戰船 尙有十二).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수군을 버리고 권율 도원수 산하의 육군에 합류하라는 선조의 어명에 반하여 올린 유명한 장계이다.

여기서 12척이라고 선조에게 장계를 올리는 걸 보면 신임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끌고온 1척은 장계 이후에 온 게 아닌가 하고, 이에 더해져 13척이 되었기에 조선 수군을 그나마 보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순신은 이 13척으로 명량 해전에서 "실로 천행이다(此實天幸)라고 표현했던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런데 이때 배설의 12척이 없었다면 과연 이순신은 명량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이순신이 필생즉사의 장계로서 강력한 의지를 표할 수 있었던 것도 배설이 칠천량해전에서 도망가면서 가지고 가 회진포에 숨겨든 12척이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이순신이 백의종군 이후 여러 고을에서 많은 전쟁물자와 전투구상을 해왔다지만 배설의 12척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아무리 이순신이라고 해도, 그리고 아무리 물길 사나운 명량이라고 해도 그 울돌목에서 일전을 치르려 하였을까?

그래서 이순신은 배설에게 간곡하게 묻는다 전선이 어디에 있느냐고...?

그래서 배설이 도망간 이후에도 난중일기에서 배설을 크게 원망하거나 나무라지를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죽음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싸움이 무서웠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군영이탈자라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배설의 군영이탈이 조선을 살릴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배설이 경상 우수사로서 살기 위해서 통제사의 명령없이 후퇴하면서 보존한 이 판옥선 12척은 훗날 이순신 장군과 함께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해전을 펼치게 된다. 전선이 없으면 천하의 이순신도 어쩔 수 없으니 어떤 의미로는 12척의 판옥선을 남김으로써 이순신에게 역전의 기회를 남겨준 임진왜란과 명량해전의 숨은 영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크게 아쉬운 것은 도망만 가지 않았더라면 이다.

배설(裵楔) 조선의 무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건부(建夫) 또는 중한(仲閑)으로, 이유가 어찌 되었든 고위 지휘관이란 사람이 전시에 탈영을 해버렸으니 도원수 권율은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고, 배설은 숨어 살다가 왜란이 완전히 종결된 이후인 1599년에 고향 경상도 선산군에서 체포되었고 서울로 압송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조정에서 배설의 부친과 아들 배상충을 붙잡아 인질로 잡은 후 배설을 체포해 처형한 후에 배설의 부친과 아들은 배설이 처형되고 나서 풀려난다.

‘안되는 싸움이야... 개죽음 당하고 싶은가!’

퇴각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칠천량에서 자신의 휘하에 있는 12척을 이끌고 도주하면서 남긴 명대사이다.

‘적이 강한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지요!’

‘어찌 진격만이 전략이란 말이오이까? 퇴각도, 전략이에요 전략!’

퇴각도 전략이라던 그는 공교롭게도 명량 해전 직전에도 한번 더 시전하고 탈주한다.

난중일기에는 ‘9월 2일(양력 10월 12일) <경인> 맑다. 오늘 새벽에 경상 수사 배설이 도망쳤다’라고 적고 있다. 참고로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함선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함선 330여 척을 거의 전멸에 가깝게 격퇴했던 해전 이전이었는데, 그는 대첩 보름 전에 도망쳤다

그러나 칠천량에서의 배설이 도주하지 않고 싸워 전사했더라면, 과연 이순신은 조선을 구할 어떤 대안을 계획할 수 있었을까?

아이러니하지만 배설의 도주가 이순신으로 하여금 조선을 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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