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나주시민의 상 박 종 학 수상자
2025년 나주시민의 상 박 종 학 수상자
나주 농업 리더십 - 세지멜론 유통 혁신 - 공동의 힘으로 시장을 바꾼 보기드문 선례 이끌어
한 지역 농업의 운명을 바꾸는 일은 거창한 구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비 오는 날 선별장 바닥을 닦고, 새벽 첫 차를 맞고, 클레임 접수 표를 펴고, 농가 통장을 하루라도 빨리 채워주는 일에서 시작된다. 1975년 세지농협에 첫 발을 들인 박종학 수상자는 1997~2009년 조합장 재임 동안 ‘공동의 힘’을 제도화해 세지멜론을 나주의 대표 브랜드로 키워냈다. 올해 ‘2025년 나주시민의 상’(산업경제 부문) 수상 소식은, 이름보다 현장을 바꾼 방식에 쏠려야 할 박수다. 이 글은 박종학이 40여 년 현장에서 축적한 유통 혁신의 작동 원리를 기록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남겨야 할 숙제를 정리한 작은 기념비다.
▶ “같이”의 발견 - 한 농촌 청년의 문제의식
1970년대 중반, 나주 세지는 농업의 산업화 물결에 막 올라타던 시기였다. 농가들은 각자 수확한 멜론을 개별 출하했고, 도매시장 가격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요동쳤다. ‘똑같이 키웠는데, 왜 가격은 제각각일까.’ 젊은 직원 박종학이 현장에서 가장 자주 들은 질문이었다. 그는 답을 품질의 표준화와 정산의 신뢰에서 찾았다. 개별 농가의 선의를 넘어서는 제도가 필요했다. 그가 훗날 “같이 모아, 같이 고르고, 같이 정산하자”고 제안한 이유다. ‘같이’는 구호가 아니라, 가격·품질·정산의 시스템을 뜻했다.
▶ 조합장 박종학 - 원칙을 제도로 바꾸다
1997년, 그는 조합장에 취임한다. 취임 일성은 간명했다. “공동으로 출하하고, 공동으로 선별하며, 공동으로 책임진다.” 그해 그는 전국 최초 ‘멜론 공선출하회’를 조직하고, 품질관리 지침을 문서로 제정했다. 당도, 과형, 과중, 외관 결점, 당산비와 같은 항목을 수치로 명문화하고, 선별장의 이중 검수를 의무화했다. 선별이 엄정해질수록 불만도 생겼지만, 그는 선별장 앞에서 검수표를 들고 끝까지 설명했다. “오늘은 깎였지만, 내일은 시장이 올려줍니다.” 그 약속은 거짓이 아니었다. 규격과 신뢰는 가격을 부르고, 가격은 다시 농가의 투자와 학습을 불렀다.
그러나 품질만으로는 현금흐름의 불안을 이길 수 없었다. 경매가가 흔들리는 날이면 농가의 통장은 빈 채로 남았다. 그래서 그는 ‘3일 공동정산제’를 도입했다. 출하 후 사흘 안에 대금을 정산하는 제도다. 도매시장 낙찰이 지연돼도 조합이 먼저 지급해 농가의 유동성을 지켜냈다. 이 작은 제도가 현장에 준 의미는 컸다. “농사는 기다림의 연속이지만, 정산만큼은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 그 한 줄 약속이 생산의 의욕을 살리고, 다음 투자를 이끌었다.
▶ ‘세지 표준’의 탄생 연구·학습·피드백
제도는 종이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그는 품종 연구와 현장 지도를 병행했다. 지역 기후·토양에 맞는 품종을 선별하기 위해 소규모 실증 포장을 돌렸고, 생육 단계별 비배관리 매뉴얼을 만들어 공유했다. 농가들이 함께 쓰는 스터디 노트에는 병해충 예찰, 관수·시비 스케줄, 수확 후 관리 팁이 빼곡했다. 매주 한 번, 그는 스터디를 열어 영농일지를 나눠 읽고 상호 코칭하게 했다. “농업의 상향평준화는 개별 비법이 아니라 공유의 문화에서 나온다.” 그가 여러 차례 되풀이한 말이다.
클레임 관리 역시 중요한 학습의 장이었다. 소비지에서 들어온 이의제기는 즉시 산지로 피드백됐고, 다음 출하부터 개선 항목이 반영됐다. 자연스레 이력관리 카드와 라벨링이 보편화되며, 소비자에게 ‘세지멜론=믿음’이라는 간판이 달렸다. 이 축적은 곧 대형 유통업체 직거래의 기반이 되었고, 소비지 판촉전은 이벤트가 아니라 고객과의 약속 확인이 되었다.
▶ 바다를 건너다 - 수출의 문, 신뢰의 문
그는 국내 시장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본 수출을 시도하며 검역·위생·포장 규격을 한 치 오차 없이 맞췄다. 바이어와는 단기 가격이 아닌 장기 파트너십을 택했다. 선적 전 샘플링, 도착지 온도 기록, 리콜 프로토콜까지 체크리스트로 만들어 상호 투명성을 높였다. 이런 방식은 변덕스러운 환율과 물류 변수 속에서도 세지멜론의 신뢰 잔고를 쌓았고, 그 결실 중 하나가 ‘수출 백만불탑’의 성과였다. 수출이 늘자 산지는 기대를, 조합은 책임을 더했다. “브랜드는 우리 손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바이어의 장부에도 같이 찍혀야 한다.” 그의 말은 수출의 본질을 겨냥해 있었다.
▶ 상은 이름보다 방법에 있다
박종학 수상자의 업적을 상징하는 트로피는 적지 않다. 농협중앙회 유통개혁 선도 조합상(2000), 농산물 품질경영 대상(2007), 그리고 올해의 나주시민의 상까지. 그러나 그가 남긴 더 큰 상은 현장의 방법론이다. 포장재 공동구매로 비용을 낮추고, 저온물류 체계로 신선도를 지키고, 로컬푸드·학교급식으로 지역 순환을 확대한 일. 영농 폐자재 수거·재활용과 수확 잉여물 기부 같은 작은 선행을 ‘조직의 표준’으로 만든 일. 이는 농가 소득을 넘어 지역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오늘, 기후위기와 인구절벽, 보호무역과 물류 리스크가 겹겹이 농업을 압박한다. 그럴수록 박종학의 방식은 더 선명해진다. 리스크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 흡수해야 한다. 그 시스템의 핵심은 데이터·표준·정산·피드백이다. 공선출하와 공동정산은 아날로그의 유산이 아니다. 지금은 디지털 이력관리·스마트 선별·계약재배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할 시간이다. 그는 퇴임 뒤에도 청년 농업인 멘토로 서서, “다음 10년은 기술과 유통, 브랜딩을 함께 배워야 산다”는 말을 남긴다. 청년이 들어와야 산업이 늙지 않는다.
▶ 나주가 박종학에게, 박종학이 나주에게
올해 10월 30일, 나주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릴 제31회 나주시민의 날 기념식장에서 박종학은 상을 받는다. 윤병태 시장은 “산지의 표준과 시장의 신뢰를 연결한 혁신가”라 평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늘 한발 물러서 말했다. “이 상은 제 것이 아니라 세지 농가 전체의 상입니다.” 수상 소감이 아니라 평생의 태도다. 공동의 힘을 믿는 사람, 실패를 기록해 다음 성공의 재료로 쓰는 사람, 정산일을 앞당겨 농가의 밤잠을 지켜주는 사람, 나주는 그 사람에게 상을 주고, 그는 나주에 방법을 남겼다.
▶ 다음 세대를 위한 다짐
우리는 한 사람의 공을 기리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공동의 힘을 제도화한 리더십을 새로운 기술과 시장 위에 다시 세워야 한다. 세지멜론이 보여준 표준화·정산·수출의 선순환을 딸기·토마토·파프리카 등 타 품목으로 확장하고, 저탄소 재배와 순환농업을 결합해 지속가능성을 브랜드의 핵심 가치로 삼아야 한다. 지역 대학·연구소·지자체와 손잡고 데이터 기반 영농 컨설팅과 스마트 선별·물류 인프라를 갖추면, 나주의 농업은 다시 한 번 곡선을 그릴 것이다.
사람의 노력은 하나의 제도를 만들고, 하나의 제도는 지역의 문화를 바꾼다. 비 오는 날 선별장 바닥을 닦던 청년은 공동의 힘으로 시장을 바꾸는 리더가 되었다. 그가 걸어온 길이 내일의 표지판이 되기를, 그리고 그 표지판을 따라 더 많은 청년과 농가가 새로운 길을 만들기를 바란다. 그것이 ‘나주시민의 상’이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과제이며, 박종학이라는 이름이 지역의 기억 속에서 오래 빛나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