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난 효자 17대 신임 나주시 노인회 이상계 회장
<나주토픽이 만난 사람 205>
소문난 효자 17대 신임 나주시 노인회 이상계 회장
농업경영인→시의원→배원협조합장
→ 무경선 노인회장 성공신화 창조한 거인
‘청렴이야말로 가장 큰 사업이다. 그래서 포부가 큰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려고 한다.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것은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이다.’라는 격언을 가슴에 담고 가난하고 힘들었던 젊은 시절 ‘청렴한 선비의 마음으로 항상 바르게 살자!’라는 신념 하나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살아왔던 사람, 부모님의 꾸지람을 들어가며 기름진 옥토에 배 과수원을 일궜던 20대 미청년이 성장해 세계 16개국으로 나주 배를 수출하며 800만 달러 수출 탑의 영광을 안겨준 뛰어난 경영인으로 크게 주목받으며 수많은 미담을 만들어 왔던 농업경영인이 지역 어르신의 수장이 되어 다시 지역사회의 봉사 대열에 나섰다. 지난 11월 28일 나주시 노인회장으로 취임한 이상계 전 나주 배 원예농업협동조합장(이하 이 회장)의 이야기다.
▶ 역경을 기회로 일궈 이겨낸 선지자
신임 나주시 노인회장 이 회장은 20대에 배 농사를 짓기 시작한 후 현재까지 꾸준히 농사를 지어오며 최고 수준의 맛을 내는 배 과수원 8천 평, 복숭아 과수원 7천 평을 직접 경작하는 전문농업인으로 미래를 직관하는 선견지명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회장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대다수 지역이 가릴 것 없이 가난에 찌들었던 시절, 농촌마을 세지면 대산리 죽산마을에 터전을 둔 조부, 증조부, 고조부 3대에 걸쳐 한약방을 가업으로 비교적 넉넉하게 생활했었고, 호남지역 명문 고창고보와 평양대학 출신의 부친을 자랑으로 여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갑자기 가운이 기울어지며 힘든 청소년 시절을 겪어내야만 했었다.
고인이 된 부친 이명수 씨의 40세 늦둥이이자 2남 6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힘들게 살았지만, 부모님 생전 단 한 번의 말대꾸조차 해본 적 없이 순종하는 효자 아들이었다. 또한 성년이 넘어서까지 수박, 무 등의 작물 경작을 가업으로 삼으며 장남의 역할을 다했고 가난의 틀을 벗어난 농업경영의 선지자였다.
이 회장은 항상 가난 극복과 미래 개척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나주시의 황금 들판에 성공 의지를 불태우며 각오를 다진 것이다. 그리고 (25세)의 나이에 도전장을 던졌다. 당시 8,000평(배 복숭아 각 8000평)에 신고 배 모종을 심어 신품종 보급에 앞장섰다. 하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만 진행되지 않았다. 과수원을 조성 후 5~6년이 지난 1970년대에 국민소득의 증가와 함께 수령을 다한 배 과수의 식상한 과일 맛, 사과 등 수입 과일의 확산으로 배의 소비 감소는 물론 배농가 소득감소로 이어졌다. 소득감소는 배농가의 대규모 배나무 제거 작업으로 이어졌고 급속한 농촌구조의 변화가 요구됐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단, 한 그루 배나무도 베어내지 않았다. 이미 변화를 예측했던 신고배의 선택과 성공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 성공 신화 창조한 전문 농업 경영인
이 회장의 탁월한 선견지명으로 조성된 신고 배 과수원은 10년 후 어김없이 성공의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인생 역전의 발판은 물론 과수농가의 표본이 되어 나주 과수농가의 혁신에 크게 이바지하며 지도자의 대열에 들어서게 됐다.
자천타천으로 나주 시의원으로 출마했던 이 조합장은 상대 후보에 크게 앞선 다 득표로 당선되었으며 나주시의회 3대와 4대에 걸친 활동은 지역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재임 8년간의 나주시의회 의정활동 중 건설교통위원장과 운영위원장을 역임했고, 10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의장 임무를 수행하며 그의 역량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특히 크고 작은 경비를 자비로 부담하며 솔선수범 앞장선 봉사활동은 지금도 지역민들로부터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임기 3개월을 남기고 2006년에는 나주시 배 원예농업협동조합장에 출사표를 내밀어 당선되었고 3선의 영예를 이었다. 8천 평의 임야를 바탕으로 가난을 극복한 농업지도자가 2선 시의원, 3선의 연임 명품조합장 성공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 소문난 효자가 노인 사회를 이끄는 미담 창조
이 조합장 부부는 효자 효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회장은 항상 1976년 부인 박영애(72) 여사와의 만남을 '가문의 축복 그 자체였다'라고 말한다. 두 사람의 자상하고 정성스러운 부모 봉양은 가업 번창은 물론 사회 본보기로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시력을 잃은 시어머니를 15년간 봉양 등의 공로로 대통령 효부상(박영애 여사), 나주시장상, 노인회, 교회 등의 표창을 받았다. 만인의 존경 대상으로 공인받은 미담으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만인으로부터 존경받은 이 회장이 이젠 큰 어르신으로 동료에게는 행복한 동행을 후배들에게는 배려와 사랑을 전하며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큰 역할을 부여받았다. 3대째 이어지는 무경선 선출 또한 이 회장의 덕망으로 이뤄진 아름다운 사연으로 기억되는 것은 물론 지역사회의 본보기로 이어질 것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