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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신동운

마이너스 인생에서 5000여 평의 어엿한 양돈농장 사장으로

  • 입력 2014.05.27 15:23
  • 수정 2014.05.2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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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늘 연상하며 살았다. 자식들에게만은 천하에 몹쓸 그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온몸으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언 70에 이르렀다.
항상 입가에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자신의 것 아끼지 않으며 곧잘 이웃에 베풀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언제 가난을 알았을까 하는 여유로움이 무척 돋보인다. 하지만 오늘이 있기까지는 그야말로 피눈물 나는 고통이 있었음을 소개받고 조심스런 접근을 시도했다. 자유스런 대화 속에 인터뷰를 요청하자 한사코 거절하는 김창섭 사장에게 읍소하며 허락을 받았던 만큼 진솔한 마음으로 의견을 나누었다.

 
잊지 못할 어린 시절
가까이 장성읍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다. 자신이 제법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철없이 자라던 어린 시절이 있었는데 순수한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어릴 적에는 퍽이나 가난했다. 하지만 맑고 밝은 성격만큼은 항상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남달리 다정한 친구들도 많았다. 그래서 학교생활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항상 그의 뒤에는 가난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먹고 사는 것조차도 부실하였고 사친회비도 제대로 내지 못하여 기죽고 맥이 풀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친구들 앞에서 사나이로서 멋진 기개를 잃지 않으려 부단한 노력을 하였고,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 또한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가난이 죽도록 싫었던 어린 시절
어렵사리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먹고 살기위한 수단으로 나주로 이사를 하여 새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온갖 어려움 속에서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가난 때문에 상급 학교에도 갈 수 없었다. 가난이 죄는 아니라고 하지만 자랑 또한 아닌 것도 분명하다. 무려 5일 동안을 거의 굶다시피 생활해 본 시절도 있었다. 둘째 형이 산에 올라가 나무껍질을 벗겨 모아 팔고 그 돈으로 좁쌀을 구입하여 나물들과 섞여 밥을 지어 5남매가 곡기를 채운 얘기를 하며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한때 가난 때문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힘겹게 살았던 시절의 마음 아픈 기억들이 결코 쉽게 잊혀 지지 않았음이리라…….

꿈은 크고 생활은 소박하게
겨우 16살의 청소년 김창섭이었다. ‘꿈은 크고 생활은 소박하게’라는 신념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 길거리에서 호떡장사를 시작하였다. 빡빡머리에 허름한 오버를 입고 낡은 워커(군용구두)를 신었다. 제 나름대로의 멋을 부리며 손수레를 끌며 호떡을 팔았던 그 짧은 순간이 첫 사업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큰 돈벌이는 되지 못했다. 겨우 월세 방을 구할 돈을 벌어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꿈을 펼치기 위해서 그의 몸과 마음 영혼까지도 서울로 향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자그마한 회사에 일을 하면서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가면서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김 사장의 성실함과 긍정적인 사고는 그로 하여금 행복한 삶의 길을 걷게 하는데 질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소박한 꿈의 실현을 위해서 결코 몸을 아끼지 않았고 그의 헝그리 정신과 부단한 노력은 인생역전의 중요한 촉진제가 되었다. 적은 월급을 조금 씩 모아가면서 꿈을 키워나가기 위한 발걸음으로 봉급장이에서 분식점으로 그리고 제과점으로 부의 정도를 조금씩 키워나갔다.

소비자의 신뢰가 김 사장을 사업가로 만들었다.
마침내 10여 년에 가까운 서울생활을 마감했다. 그 동안 한시도 머릿속에서 잊혀 지지 않았던 배고팠던 어린 시절의 고향을 다시 찾았다. 그가 꿈꾸었던 부의 꿈을 실현하고자 노안면에 왕병아리와 육계, 산란계와 한우, 돼지 몇 마리로 종합농장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시작은 결코 신통치 못했다. 인내와 노력이 필요했다. 영산포시장과 송정리시장을 오가며 사업의 확장을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쉽지 않았고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성실함과 끈질긴 노력은 성공의 길로 안내받고 있었다. 시작은 왕병아리였다. 미래를 예측하고 좋은 품종을 선택하여 튼튼하게 기른 병아리들이 소비자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드디어 무한한 신뢰와 사업이 번창하게 된 것이다. 시세차익을 정확히 판단하여 제공한 정보는 동업자들에게 돈을 벌게 해주었고, 신뢰가 점차 쌓이면서 주위 사람들이 그를 사업가로 만들어 주었다.

전문가의 길로 인생 승부
40세였다. 당시 그의 손에 4천만 원의 거금이 들어와서 서울 독산동 상가매입을 시도했다. 그 상가의 당시 시가는 5천만 원이었지만, 융자의 혜택을 몰랐던 김 사장은 구입을 포기하고 대신 현재의 양돈농장 터를 구입했다.
서울 독산동 상가 건물의 현재 시가는 150억 원에 가깝다고 하지만 그는 그다지 후회하지 않았다. 그 건물을 구입했으면 아마 자기는 ‘교통사고로 죽었을 거다.’라고 말했다. 한 치의 눈앞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 저렇게 긍정적으로 대범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1995년에 금천면 소재 현재의 땅을 구입하였다. 그 곳에다 농장을 짓고 양돈 전문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에 100여 마리의 돼지를 구입하여 사육하면서 새벽 2시에 일어나 농장에서 쉴 틈 없이 일하는 김 사장을 줄곧 가까이서 바라보며 줄곧 주위 사람들은 ‘나주에서 제일 부지런한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현재는 3000여 마리 규모의 어엿한 양돈 사장이 되었다. 하지만 늘 남루한 작업복을 입고 장화를 신고 잡부처럼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다. 참으로 자랑스럽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과학영농에 많은 연구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나주에서 최초로 무항생제 해쌉(HACCP) 인증을 받아 양돈업의 선도적인 역할을 다하고 나주 시민건강은 물론 양돈농가의 소득을 위한 판매촉진 및 축분 처리 등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있다.

하고픈 한마디
그는 현재 (사)양돈협회 전라남도 지부장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양돈사육에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고가의 사료비와 수시로 찾아오는 병 때문이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조류 AI를 지켜보면서 양돈이나 다른 가축에도 올 수 있는 공포감 때문에 항상 불안하다고 한다.
따뜻하게 웃어주는 아내와 든든한 두 아들, 어린 손자와 손녀 등과 함께 생활하면서 시름을 곧잘 잊어버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자랑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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