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경영 외길만으로 자수성가한 왕곡농축영농조합법인 김송백 대표이사
탁월한 판단력과 예지력으로 선진 농업경영을 선도하며 성공 가도를 걸어온 걸출한 선각자
국가 경제가 어려워 위기가 닥칠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 있다. 위기 뒤에 항상 기회와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농촌에서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멈춘 지 오래된 현실과 함께 인구는 줄고 초고령화되고 다음 세대가 들어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 농업 노동에 대한 가치가 고령화된 '현실'에서부터 청년 농업인들의 '미래'에까지 보편적인 가치, 생산자만의 유일한 가치로 여기며 사명감을 불태우며 성공시대를 이끌어가는 신지식인 즉 농업경영인들이 늘어가며 농촌에 희망이라는 새바람으로 성공시대를 이끌어 가고 있다. 평균연령 약 70대에 가까워진 농어촌에 희망을 불어넣는 역할을 수행하는 꿈을 실천해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농사란 편히 지을 수 있어야 하고(편농), 수지맞아야 하며(후농), 농업인의 위상도 높아야 한다(상농)’라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실용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부농을 선도하며 발상의 전환으로 성공한 자랑스러운 농업 경영인들이 전국 곳곳에서 지역특산품을 개발 또는 브랜드 창출과 함께 선진 농업 국가를 이끌어가고 있다. 나주지역 역시 농업 분야에서 특출한 인물을 배출하며 역사수도 에너지 수도 비전에 동행할 수 있는 선진 농업경영의 보고로 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농업 분야 선각자들의 더욱 많은 발전과 출중한 인물의 배출을 기대하며 맨땅 빈손의 젊은 나주 청년이 지혜와 용기를 바탕으로 50만 평의 명품 땅의 대지주이자 축산 대가로 성장해 자타가 공인하는 자랑스러운 나주인을 소개해본다. 주인공은 바로 복합영농인 왕곡농축영농조합법인 김송백 대표이사(이하 김대표)이다.
▶ 나주 사랑 향한 집념과 당당한 발상, 지혜로운 사업추진으로 자수성가한 복합영농 대가
김대표는 성공한 농업경영인들의 독특한 특징을 그대로 간직한 타고난 일꾼으로 농업경영에 대한 노하우와 철학을 지닌 걸출한 인물이다. 자기경영에 자기가 책임을 지는 투철한 주인 정신, 끝없는 열정 그리고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과감하고 당당한 발상 전환, 경영혁신 마인드로 성공을 이끌며 농업 분야 기업을 창업한 기업인이기도 하다. 또한, 어떤 분야든 ‘성공’의 확신을 자부하면서도 부족한 기술을 찾기 위해 농업기술센터와 농업기술원으로 다니며 마케팅교육과 컨설팅교육 상품 포장 및 유통까지 별의별 교육을 다 받으며 성공을 이뤄낸 의지의 한국인 이다.
지금은 지역 곳곳의 알짜배기 황금의 땅 50만 평을 소유한 대지주이자 전 국민의 입맛에 최고의 배 맛을 선사한 최고의 배 영농인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공인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다가오는 미래, 전 국민에게 최저의 값으로 최고의 한우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열정을 다하고 있는 왕곡농축영농조합법인 대표이사이다. 또한, 가난했던 시절을 기억하며 손길 미치지 않은 어두운 곳에 도움을 주는 봉사왕을 지향하며 사회봉사에 앞장서고 있다. 이같이 ‘열정으로 가득 채워진 김대표의 자질 그리고 단단한 의지로 다진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라는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김대표는 나주시 왕곡면 화정리 마을의 여유롭지 못한 농가에서 5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1961년 태어나 19세부터 21세까지 서울 생활을 제외하고 평생 나주를 떠나본 적이 없는 정통 나주의 민초이다. 온 나라가 가난했던 그 시절 유별난 사랑은 받지못하고 성장했지만, 아주 독특한 취향 즉, 항상 그의 머릿속에는 미래 계획이 담겨 있었고 연구하며 실천해가는 미래지향적 소년이었다. 가난이 싫었고 큰 땅을 갖고 싶었다. 평범한 소년의 마음이었지만 생각이 깊었고 ‘근면과 약속 그리고 보답’이라는 덕목을 항상 가슴에 담고 어김없이 실천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인생 철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김대표는 무지렁이처럼 순박했던 19세 시절 선택한 상경과 21세 머무름 없는 귀농의 선택은 부농의 꿈을 이루기 위한 일생일대 최고의 선택으로 자부하고 있다. 상경 후 봉착했던 일자리 마련의 어려움은 ‘세상은 의지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경험했고, 김대표의 특유한 집념과 부지런한 근성을 발휘한 서울 생활은 ‘큰일을 할 놈’으로 인정받은 기회는 물론 서울에서 쌓은 인맥과 신뢰도는 훗날 사업확장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특히, 서울 생활 2년 후 기억속에 남겨진 모친을 향한 귀향 선물이었다. 모았던 돈 1300만 원을 모친의 손에 꼬~옥 쥐어드렸더니 “오메 우리 송백이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었어?‘라며 놀라는 어머님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며 효도을 다짐했던 그 순간은 사람사랑을 다짐하는 기억으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귀향한 김대표는 형님 농장에서 일을 도우며 전국을 대상한 배즙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최고의 품질만을 고집했던 김대표는 그동안 쌓아온 인맥을 통한 대성공으로 사업기반을 구축했다. 특히, 그를 신뢰했던 서초구민은 물론 지난 2년 동안 소중한 경험으로 이어진 인맥들은 모두 그의 판매 사원이자 고객이 되었고, 하루 수백만 원 상당의 매상 실적을 올리며 ’나주의 배 아저씨’란 별칭이 붙을 정도로 인지도가 향상되었다. 매상 실적은 눈에 띄게 증가했고, 수입이 늘어난 만큼 땅을 사들여 배 과수원 경영, 한우 구매 등의 사업영역도 넓혀 갔다.
하지만 IMF 시절 보증과 산 투자로 부도의 아픔을 겪고 한때 좌절도 경험했다. 그 좌절의 시간 서울 지인의 조건 없는 5억 원 지원은 종잣돈이 되어 나주 농·축산가를 대표하는 부농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 선진 농업기술과 복합영농 경영시대 문 열어
김대표가 성장하는 동안 터득했던 것은 ’준비하고 공부하는 농민은 반드시 살아남는다‘라는 소중한 경험이다. 20대 초반 배 관련 사업을 시작한 후 부도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성장을 거듭한 김대표는 6만 평의 2만여 그루의 배 과수원을 경영하면서도 미래를 대비해 30여 마리의 한우를 사육해왔다. 배 소비층의 변화로 인한 배 수요 감소를 예측하고 ’한우 사육이 농촌의 미래’라는 냉철한 판단으로 대 축산농가의 기초를 닦기 시작한 것이다
40년에 가까운 배 과수원 운영과 한우 수요 예측은 그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지난 2012년에는 연 12억 원의 소득을 올렸던 배 과수원을 과감히 정리하고 5000두 사육 대 축산농가로서의 대도약을 위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연한 기업인의 자세이지만 탁월한 발상이고 쉽게 도전하기 힘든 목표치에 도전장을 내민것이다. 또한, 김대표의 꾸준한 기술을 축적과 효율적 투자로 성공 가도를 향한 탄탄대로를 걸어가고 있다. 올해 7월 현재 약 1,300마리의 한우 사업현장은 짧은 시간 내에 5000마리의 타 기업 추종 불허의 대 사육 농가로서의 성장이 기대된다. 더욱 희망적인 것은 자랑스러운 아들들이 도약에 동참하며 힘을 보태고 있다는 것이다. 후계자는 물론 대한민국 농촌의 장래를 밝게 해주는 명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농업도 과학이라는 주장’으로 ‘생산에서 판매까지 준비하고 공부해야만 한다’라는 지론으로 상생에 앞장서는 김대표의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김대표는 최근 바쁜 일과 속에서도 이웃 봉사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봉사의 손길이 닿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근면과 약속 그리고 보답’이라는 생활신조를 철학으로 이어가며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육체적인 봉사는 물론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거금도 쾌척하며 사회적 약자를 돕는 사람 사랑 실천은 주위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또한, 그의 인간적인 배려를 지켜보는 이웃들은 한결같이 ‘그의 성공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라는 사실이 감동으로 승화되어 가슴에 스며들게 한다.
어느새 환갑을 눈앞에 둔 김대표의 성공 배경에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부인 나혜숙 여사의 존재이다. 힘들었을 때 두 부부가 하나가 되어 고난을 극복하며 성공의 틀을 다져왔다. 지금은 두 아들이 부모님을 도우며 후계자의 길을 자청하며 든든한 동행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김대표의 나주사랑과 가족사랑이 모두의 꿈으로 공유되고 상생하는 도시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감한다.
<나주토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