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나주토픽이 만난사람
  • 기자명 나주토픽

소탐대실을 멀리하는 팔방미인 자원조경건설 남촌 최창순 대표이사

  • 입력 2020.04.12 00:44
  • 수정 2020.04.12 01:04
  • 댓글 0

소탐대실을 멀리하는 팔방미인 자원조경건설 남촌 최창순 대표이사

대도무문 철학으로 제2의 인생을 개척하며 지역 사랑 선도하는 촉매 역할 다해

최창순 사장
최창순 사장 부부

  기나긴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활짝 피운 매화꽃이 봄을 알리는 봄날이 오면 어김없이 나주시 곳곳을 축제 분위기로 만드는 화사한 벚꽃과 그리고 소담스럽게 핀 새하얀 목련꽃이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뜨거운 여름날에는 시골 곳곳의 마을회관 앞에는 잘생긴 느티나무가 만든 반가운 그늘은 여유로움을 주고, 가을바람을 쉴 새 없이 나는 영산강을 말끔히 바라보는 청명한 햇빛은 찬란하게 반짝이며, 바닥을 노랗게 수놓은 은행잎들을 향해 천년고도 나주를 아름답게 수 놓으라 명령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풍경들을 보고 절세의 미감을 공유하는 행운아들이다. 이런 매력적인 풍경 앞에서 쾌락과 감흥을 갖게 되는 그것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 나주 시민이 지니는 낭만적 풍경들이 결코 우연이 아닌 누군가 의도하여 연출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조경’이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가꾸어진 것이다.

  나주토픽 145호에서는 나주 시민의 행복 공간 조성에 이바지함은 물론 전국을 누비며 나주인의 긍지를 전하는 최고의 조경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주인공은 바로 나주 시청 앞 가로수 공원 등 소나무 식재로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며 진가를 돋보인 팔방미인 남촌(南村) 최창순 사장(이하 최 사장)이다.

  ▶ 세심한 경쟁력 확보로 조경 인생을 개척한 명 조경사

  최 사장은 왕곡면장을 지낸 엄격한 부친의 교육 아래 성장한 장남으로 어릴 땐 속을 썩이는 역할도 했지만, 주변 모든 사람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성공 가도를 걸어오며 효자 노릇도 다한 따뜻한 남자다. 그러나 한때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난 생활로 방황했지만, 어린 시절을 일찍 마감하고 17세의 나이에 이른 군 생활을 시작했고 대한민국 육군 부사관으로 10여 년간 병역의 의무를 다한 몸과 마음이 건강한 쾌남이다. 군대 그리고 군인, 인간 최사장에게 군 생활은 인생 도전의 첫 시험이었고 인생의 기초를 닦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동료와의 우정과 사랑 즉, 전우애를 통해 삶의 방식을 터득하고 자신도 모르게 배려의 미학을 몸에 익힌 것이다. 울퉁불퉁한 성격이었지만 작은 것을 더욱 아끼며 부족한 것을 더욱 사랑하는 인간미 넘치는 그의 행동거지는 이웃의 흠모 대상이 되었고 훗날 성공의 기틀을 다진 것이었다.

  7년 동안의 군 생활을 했던 최 사장은 제대 후 1980년 그는 인생에 있어 가장 의미가 컸던 결혼과 또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지인의 소개로 전혀 뜻하지 않았던 유흥업계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돈을 벌고 싶어 퇴직금을 투자해 유흥업계에 투자를 시작했고, 많은 돈도 벌어들이며 10개에 가까운 업소를 운영하며 큰 손으로 대우를 받았다. 호탕한 성품에 의리를 중시하는 최 사장에게 많은 도움의 손길이 미친것이었다. 최 사장 역시 잠시 자신의 성격에 걸맞은 사업이라 여기며 즐기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았고 유흥업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가 경험했던 그 시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역시 사람이었다’라는 것이었다. 처음 느꼈던 치욕적인 배신감과 잠시의 패배감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지만 통 큰 남자 최 사장은 곧바로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실패보다 더 아팠던 것은 적은 노력으로 쉽게 돈을 벌려 했던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이었고, 부끄럽지 않은 남편 그리고 자랑스러운 아빠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것은 새로운 인생 도전의 명확한 사유였고 그 서막을 열게 된 동기가 되었다.

  ▶ 대도무문 철학으로 제2의 인생을 개척한다.

  1980년 그동안 어깨에 잔뜩 힘을 싣고 거만할 정도로 세상을 살아오던 최 사장은 조경업계의 노동에 몸을 던지게 된다. 평소 일은 뒷전으로 보내고 놀이만을 즐기던 최 사장이 손에 삽을 들면서부터는 한치의 부끄럼도 없이 과거 경험하지 못했던 피땀을 흘리고, 보람을 채우며 삽자루의 친구가 되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게 된 것이다. 최 사장은 항상 ‘문은 두드리면 열리는 것이다!’라는 신조 그리고 대도무문의 철학으로 새로운 도전의 길을 선택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사장이 최사장의 손에 전정 가위를 쥐여준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은 훗날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오가며 곳곳에 공간 미학을 창조하는 성공한 조경사의 탄생을 예고해주는 대목이 되었다. 불혹의 나이 40이었다.

최 사장은 비록 늦은 나이에 조경업에 몸을 담게 되었지만, 조경 분야에 대한 투자 가치에 크게 무게를 두었고 성공을 확신했다. 또한, 최 사장은 국제화 시대에서 조경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작지만 강한 아이템으로 세심하게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지역성, 토속성, 지역이 갖는 미래의 잠재력 모두는 소중한 경쟁력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신출내기 조경사가 대도시에서의 자리 잡기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그의 소중했던 과거 경험들은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하는 자산이 되었다. 가장 무서운 존재가 사람이었지만, 또한 사람이 그의 성공 가도에 레드카펫을 깔아준 결과가 되었다. 그의 부단한 노력과 열정은 불과 몇 년도 되지 않아 조경계에서는 으뜸의 전문가로 인정받으며 꾸준한 성장을 이어갔다. 그때 비로소 봉사하는 사회구성원으로, 가정에서는 자랑스러운 가장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 인생좌우명 ‘부모에게 효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의 실천이 이끈 성공가도

  수도권에서 성공 가도의 터전을 다듬어가는 시절인 1990년 최 사장은 힘든 선택을 해야만 했다. 다름 아닌 부친의 병환이었다. 하지만 고민도 한순간일 뿐 최 사장은 절대 머뭇거리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부모님 수발을 위해 귀향길을 선택했다. 결코, 쉽지 않은 힘든 선택이었지만 그의 인생좌우명 ‘부모에게 효도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자.’를 그대로 실천했고 또 다른 성공의 계기가 된다. 철부지 소년 최창순이 성공한 사업가의 최창순 사장 모습으로 변신이 되어 돌아왔다. 부모님 봉양을 위해 효자의 길을 선택한 자랑스러운 나주인으로 귀향한 것이다. 귀향과 동시에 널리 알려진 그의 조경기술 또한 지역에서 인정을 받아 아낌없는 지원도 받았다.

  다수의 지인은 최 사장은 ‘소탐대실하지 않는 지혜로운 팔방미인’이라는 표현에 모두가 공감한다. 나이의 많고 적음과 경제적 여유가 있고 없음에 따르지 않는 이웃에 대한 폭넓은 배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군에서 배웠던 배려와 사회에서 처음 느낀 배신 그리고 자연의 미가 전해주는 조화로운 삶을 경험했던 최 사장은 가식을 증오하는 사람이다. 진실과 정의를 소신처럼 여기는 최 사장은 이웃에게 ‘이웃사랑과 배려’를 강조하며 상생을 위한 노력을 당부한다. 느닷없는 시골 마을 이장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고향 사랑으로 봉사를 다짐하는 최사장에게는 많은 경력이 뒤따르고 있다. 혼잡했던 어린 시절 고향을 등졌지만, 만학으로 한국농업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했고, 동국대학교 풍수지리학을 이수했다. 그리고 전국 조경업계의 거물로 활동하며 완도 금일 명예 읍장, 나주역 운영 위원, 나주금성라이온스명예회장, 전 나주신협 수석 이사 등의 화려한 경력은 ‘베풀고 양보하고 봉사하며 살자’라는 실천 철학이 만들어 주었다.

  지금은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결혼 후 몇 년 되지 않아 부모님 봉양을 위해 기약 없는 이별이나 다름없는 오랜 기간의 불안정한 별거를 허용한 아내 이태조 여사와 두 딸, 귀향한 후 이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단 한 번의 불평도 없이 사랑하는 남편으로 자랑스러운 아빠로 새겨놓은 가족에게 최 사장은 항상 그가 겪었던 오색 빛 인생을 행복이란 대미로 이끌어 준 신의 한 수였다. 영혼마저도 ‘아내의 것’임을 주저하지 않는 최사장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으로 전하고 싶다. 또한, 소탐대실을 멀리하는 그의 사랑이 나주 사랑으로 공유되기를 기원하며 글을 마감한다.

<나주토픽>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