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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교육
  • 기자명 빛가람타임스 기자

정부 지정명인 천수봉은 무형문화재에 도전

  • 입력 2014.03.07 20:47
  • 수정 2014.03.07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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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가람이 만난 사람들<7> 남도 음식명인 천수봉

 나주만의 음식 후계자에 계승하고파

 
2013년 09월 23일 전남도의 ‘남도 음식명인’으로 첫 번째 지정 된 7인 중의 한 사람 천수봉명인 그녀는 홍어산수화 삼합의 명인으로 지정이 되었다. 김치와 배, 소나무와 학을 만들어서 홍어삼합 요리 “자연 그대로를 멋으로 꾸며가는 명인은 ‘나주의 대장금이다. 삼합의 명인이다. 사찰음식의 달인이다.” 등의 많은 별명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음식문화 분야 나주의 보배 천수봉 명인을 찾아가서 그녀의 인생과 숨겨진 이야기를 담아보고자 한다.
 
음식꾼으로서의 길
천(千) 명인은 개성이 고향이다. 6.25전쟁의 암울한 환경 속에서 어머니의 고향 나주에 온가족이 피난을 오게 되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성장하게 된 것이 명인의 첫 걸음이었고, 개성 명문가의 전통음식과 나주 전통음식의 만남이 오늘의 명인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음식의 명인이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정성을 다해 음식궁합까지 고려하며 요리할 정도로 전통음식의 안내를 받게 된 것이 곧 역사의 시작이었다.
외가와의 인연으로 22세 때 결혼을 하여 줄곧 나주에서 현모양처의 평범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본인이 결혼한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결혼하게 되는 조카딸 결혼의 폐백음식에 대해 심히 고민을 하시는 어머님께 천 명인이 손수 만들겠다는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였지만 당시 넉넉하지 못하게 사는 시절들이라서 마지못해 허락하시는 바람에 마침내 솜씨를 자랑하게 되었다. 무시했던 시어머님의 표정이 달라지고 가까이서 지켜 본 주위의 사람들에 의해 천 명인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하였다. 입소문을 통한 주문이 밀려들어 오게 된 것이다. 직장을 다녀온 후 작업이 힘이 들었지만 너무 즐거워했다. 드디어 명인의 길을 찾게 된 것이다.
 
바쁜 일정의 연속이었다. 1975년 4월 20일 둘째가 태어난 날 새마을 여성지도자로 추대를 받아 가족계획활동 분야에서 전국 최고의 성적으로 대통령 수상을 했고 상금은 마을공사에 봉사하는 등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전통음식의 뛰어난 솜씨와 사회봉사활등으로 전국을 순회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음식연구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수시로 서울 궁중원의 연수를 받는 등 시간을 아끼지 않는 노력으로 손맛의 강도를 높여 갔다. 종가집의 정통성을 잇는 격이 다른 음식연구로 깊이 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온 정성을 쏟았다. 살며시 친가인 개성시 덕암동 큰 연못과 버드나무가 있는 천 약방을 자랑하였다.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강하였다. 좋은 음식이 만들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고 뿌리가 있음을 은근히 느낄 수 있었다.
 
타고난 여장부 항상 정도를 선택하다.
전통음식을 연구하고 계승발전을 위해 대학 진학을 주위에서 권유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스펙을 갖추기 위한 형식적인 대학진학의 길은 결코 양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2남 1녀의 뒷바라지를 하는 가정환경도 어렵게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자존심의 문제였다. 오직 자신이 연구하는 음식문화에 혼을 불어넣고자 모름지기 정성을 다하겠다는 것을 늘 다짐하곤 했다. 그 정신은 곧바로 음식문화 분야에서 신지식인선정, 대통령· 국민총리 대상 수상, 국제요리강연대회 국제요리상 등 60여 개의 수상경력으로 이어졌다.
 
2년 전 여성가족부의 일자리 창출지원 사업에 응모하여 나주지역 대표로 선정이 되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지금도 선발 당시의 그 마음이 생생하다. 그리고 명인이 된 스스로를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바로 나주 모 신문에 천 명인이 특혜를 받아 선발된 것처럼 크게 보도가 되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음식을 만들고 평가를 받는 것이 어떻게 특혜를 받는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결국 선정포기를 하게 만들었다. 추천해주신 분들이 아무런 관계도 없이 오해받지 않게 한 배려였다. 포기의사가 전달되자 여성가족부에서 수차례 방문을 하여 번복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고야 말았다.
상당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의 일을 기억조차도 하기가 싫다는 표정이었다. 어렵게 선정이 되었던 사업을 반납한 것이 후회스럽고 원망하고픈 대목이었다. 지원자금의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다. 사업이 시작이 되어 예산이 집행되어도 명인의 이익이 아니고, 시민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위한 시민정신의 변화가 이뤄지기를 절실히 바라고 있었다.
전통음식문화관 설립의 꿈
‘음식 만드는 일이 귀찮지 않아요?’ 라는 질문을 자주 받지만 일축해 버린다. 음식을 만드는 것을 즐거워한다. 열중하다보면 희로애락 모두가 마음속에 담겨진다는 것이다. 전통 문화관을 만들어서 전통 음식에서 퓨전음식의 자연스런 연결로 나주만의 음식을 만들어 완성하고 후계자들에게 계승하는 것이 꿈이다. 하지만 마음 아픈 것은 가까운 나주에 수제자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9명의 제자들이 후학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중 나주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신문에 후계자 광고를 내야겠다는 멘트에 가벼운 웃음으로 넘겼다.
 
 
 
또 다른 도전 무형문화재의 길을 걷고 있다.
소박하면서도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사찰 건강식품과 지역특색 음식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책을 만들어서 후진양성과 더불어 명인의 대를 이어주고 싶은 것이다. 현재 9명의 제자 중 이 지역 출신 제자가 없음을 또한 큰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장인정신의 대 이음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동네 무당은 알아주지 않는 것이라면서 푸념 섞인 말과 쓴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면서 명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천 명인은 또 다른 꿈의 실현을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정부 지정명인 천 수봉은 무형문화재에 도전하고 있다. 지난 작은 아픈 과거도 기억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항상 미래를 바라보며 전국의 곳곳에 초청강연을 다니고 있다. 60대지만 아름답고 고운 모습과는 달리 단호하면서도 강한 명인의 의지를 바라보면서 매사 현실에 바로 고개를 숙이는 부끄러운 마음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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