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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나주를 빛낸 의로운 의병 수성 최씨 일가 최택현·최윤용·최광현· 최병현 선생

  • 입력 2019.11.12 01:36
  • 수정 2020.03.18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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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를 빛낸 의로운 의병 수성 최씨 일가 최택현·최윤용·최광현· 최병현 선생

‘전라도 의병 정신의 성지(聖地)’로 자리 잡게 하는 살신성인 큰 역할 다해

 

  남도의병 역사공원 유치를 선언한 나주시에는 96명의 독립유공자가든든한 후원자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김천일 장군을 포함한 39명의 의병은 가족의 안위마저도 포기해야 하는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겪으면서도 오직 애국의 신념으로 나주시가 ‘전라도 의병 정신의 성지(聖地)’로 자리 잡게 하는 큰 역할을 맡고 있다. 그들 중 문중 일가 4명이 밀고자에 의해 함께 피살되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지만, 세월 속에 묻혀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남원 의병장 기우만(1980, 독립장) 선생의‘송사 선생문집(1931)’ 속에서 관련 내용이 확인됨으로 자랑스러운 나주인의 애국 행위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자랑스러운 나주인은 최택현 선생, 최윤용 선생, 최광현 선생, 최병현 선생 네 사람이었고, 지난 2010년 제65주년 광복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본지 136호에 이 훌륭한 수성 최씨 일가 4명의 애국자를 소개하면서 인물사진 자료를 구하지 못해 함께 올리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39인의 애국자를 함께 올려본다.

▶ 애국지사의 순국과 행로

1909년 음력 8월 10일 함평군 학교면 진례 들판에 최택현, 최윤용 부자와 최광현, 최병현 등 네 명이 들판에 세워둔 나무 형틀에 묶였다. 죄목은 의병운동을 했다는 것이었고, 이들 네 사람은 나주의 명문가인 수성(隋城) 최씨의 일가들로 한날한시에 일본군이 쏜 총에 살해되었다. 일주일 뒤인 1909년 음력 8월 17일에는 시아버지(최택현)와 남편(최윤용)의 장례를 치른 나주 임(林)씨는 큰 돌을 가슴에 안고 동네 우물에 몸을 던졌으며 사후 우물에서 발견됐을 때 치마에 돌이 묶여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택현(崔澤鉉), 최광현(崔匡鉉), 최병현(崔炳鉉), 최윤용(崔潤龍) 네 사람은 전남 나주 다시 출신으로 의병을 조직하려고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일본 헌병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대한제국의 군대인 진위대(鎭衛隊)와 시위대(侍衛隊)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해산 군인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항쟁은 한층 치열해졌다. 즉 동년 8월 해산 군인들의 의병 참여는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참여 계층도 유생, 농민, 포수, 해산군인을 비롯하여 상인, 광부 등의 평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전면전의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1907년 9월 결성된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는 대표적인 연합 의병 진으로 장성의 기삼연을 중심으로 나주의 김준(金準)과 김율(金律) 형제, 임실의 전해산(全海山), 함평의 심남일(沈南一) 등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최택현은 1907년 8월 이후 각처에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최병현, 최광현 등과 창의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1909년 8월 이 사실을 알게 된 밀고자가 일본 군경에게 알림으로써 최광현, 최병현 등과 함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피살 순국하였다. 이들 중 최윤용(崔潤龍)은 전남 나주(羅州) 출신으로 부친 최택현(崔澤鉉)이 의병을 조직하려고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자 그것을 저지하려고 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국권 침탈 전후 처음으로 기록된 일가족 5명의 참살

일제 침략 만행을 발굴 추적해 온 정준영(71) 재야사학자는 수성 최씨 순국과 관련해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일가족이 3명까지 참살당한 기록은 있지만 5명이 함께 몰살한 기록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한다. 특히, 1910년 국권침탈을 전후해 의병활동으로 부자나 형제가 함께 처형을 당한 경우는 있어도 일가친척 네 명이 한날한시 한 장소에서 일본군에 참살당한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 학계 주장으로 전해진다. 한편, 최택현 선생은 흥양(현 고흥군) 현감을 지낸 최희량 장군의 10대손으로 애국 명문가로 가문을 빛냈다. 최희량 장군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운 것으로‘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다. 최희량 장군 신도비(전라남도 기념물 제53호)가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가흥리에 세워져 있으며, 1901년에 그의 후손들이 최희량 장군의 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했다.

<나주토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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