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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호남 최초의 아로니아 농장 경영자 호성농업법인 홍 기풍 대표이사

  • 입력 2018.11.28 00:49
  • 수정 2020.03.18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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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최초의 아로니아 농장 경영자 호성농업법인 홍 기풍 대표이사  

1등의 철학으로 농장 거부를 꿈꾸며 또닥또닥 실천해 가는 의지의 나주인 

 

홍기풍 대표

 

 

 

 

 

호성농장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선택한 카드는 대규모 토목 공사와 함께 농업조정법을 만들어 농민을 지원해 ‘일자리 창출과 농업경쟁력 제고’라는 정책으로 위기극복에 크게 이바지했었다. 우리나라 역시 과거 1997년 국가 부도로 IMF에 구조를 요청했던 시절 미국과 유사한 정책과 어느 나라에서도 감히 찾아볼 수 없었던 ‘금 모으기 운동’을 펼쳐 위기를 극복했었다. 두 나라의 대공황 위기극복 과정에는 ‘도시의 일자리 마련, 농촌에서의 젊은 피 수혈을 통한 경쟁력 제고’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탁월한 지도자의 능력과 지혜로운 국민의 저력이 뒷받침이었다. 또한, 그 저력의 배경에는 국민 모두의 고통 분담과 피땀 어린 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본지 114호에는 IMF 환란위기 당시, 전국을 오가며 건설업에 종사하며 큰돈을 손에 쥐었던 사업가가 부도와 좌절의 아픔을 딛고, 귀촌·귀농인으로 변신하여 호남 최초로 귀에 설익은 아로니아 재배로 수출사업까지 끌어내며 성공 가도를 걷고 있는 불세출 의지의 나주인 홍 기풍(66 이하 홍 대표) 사장의 전기를 실어본다.

 

 

 

  

 

 

 

먼저 홍 대표는 ‘나주 토박이로 타고 난 승부사의 기질을 가진 쾌남아’라는 문구로 시작을 해본다. 그는 단순 귀농이 아닌 사업실패로 귀촌·귀농해 건설사업과 농장경영을 겸업할 정도로 뚝심과 야망으로 가득 찬 욕심 꾼이다. 

 

 

 

사업실패의 아픔을 탓하기보다 난관에 봉착한 현실을 극복의 기회로 무장한 홍 대표는 나주시청 앞 대로에 컨테이너 사무실을 마련했지만, 항상 부족함을 느꼈다. 타고난 사업가 홍 사장은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항상 귀를 열고, 상황을 살피고 정책을 분석하며 새로운 지식을 깨우치는 길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것처럼 형의 재탄생을 고민하던 동생 홍 기대 교육대학원장의 아로니아 재배 권유가 건설사업과 농장경영 겸업을 하게 된 동기였다. 

 

 

 

홍 대표는 나주시 봉황면 용전리 가난한 농가에서 7남매(3남 4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이부터 학업은 포기하고 가장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어려운 어린 시절을 겪어내야만 했다. 6·25 전쟁 후의 폐허, 가난, 계속되는 한해 등이 척박한 사회환경이 배움의 길을 막았고 끼니 걱정마저도 담당해야 했던 순박한 어린 시절은 홍 사장에게 강한 도전 의지를 심어주는 각성제가 되었다.

 

 

 

 

 

 

 

또한, 대가족 소작농의 가난한 장남이 가야 할 길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생존의 대열에 합류해야 했었고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한 보상은 ‘돈을 버는 일’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건설현장 밑바닥부터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 열심히 일했다. 심지어는 밥 먹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일에 몰두했다. 학업을 중단했던 아픔을 동생들에게 주고 싶지 않아 더 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품삯으로 받았던 돈을 모아 동생들 납부금으로 주며 행복을 만끽했던 홍 대표의 모습은 가장 모습 그대로였다. 또한, 고된 일을 하면서도 그에게는 가족부양과 사업가로서의 성공이라는 꿈이 있었기에 지칠 줄 몰랐다.

 

 

 

  

 

 

 

그 결과 홍 대표 25세에 잘사는 대한민국 경제터전의 가도를 닦게 했던 사우디아라비아 해외건설 진출 1진의 자랑스러운 멤버로 선정되어 새로운 경험과 시야를 넓혀가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첫 해외 진출 단은 그야말로 박봉의 배고픈 군단이었다. 노동부와 당사국의 일방적인 합의로 값싼 임금으로 혹사를 당하면서도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했다. 

 

 

 

홍 대표는 긍정적 사고로 주위를 감복시키는 착한 동료였지만 고노동 저임금에 이의를 제기하며 처우 개선에 앞장섰다. 하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홍 대표의 끊임없는 현장개선 요구는 그의 귀국과 동시에 이뤄진 노동자의 승리로 알려졌고 바로 2기 후배들부터 혜택을 받게 되었다. 

 

 

 

  

 

 

 

‘오너의 길’에 대한 꿈과 도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N 토건 2년 경험은 종사자로서의 경험은 사업가로서의 변신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첫 출발은 부천에서의 창호 사업(목재 철 모두 포함)이었고 대성공이었다. 홍 대표 특유의 세밀함과 깔끔한 일 처리 그리고 인정받은 기술력의 결과였으며. 매출은 연수익 백억에 가까운 사업체로 성장과 함께 건축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 아파트 건설사업에도 진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탄탄대로의 20여 년은 IMF 장벽에 막히며 좌절의 슬픔을 경험해야만 했다. 기관의 무책임과 방치는 홍 대표의 부도로 이어졌고 투자액은 고스란히 날아가 버렸다. ‘1등을 할 수 없으면 관심도 갖지 마라!’라는 그의 인생 철학은 큰 시련에 봉착하게 된 것이었다. 20여 년의 사업터전이자 보금자리가 통째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때의 좌절감과 흘렸던 눈물은 가슴 깊이 새겨진 아픔이었지만 또 다른 기회를 기약하며 결코, 인생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성공과 뼈 아픈 좌절, 극복과 새로운 도전의 인생>

 

 

 

  

 

 

 

실패의 아픔은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후회의 시간은 그에게 사치일 뿐이었고, 오히려 부활의 기회로 삼았다. 부도처리 후 남은 1억여 원의 자본으로 고향 나주에 돌아와 컨테이너 사무실로 소규모 사업을 개시했다. 동시에 호남 지역 최초로 아로니아 사업에 진출하게 되었다. 

 

 

 

특유의 배포와 섬세함 그리고 농촌 태생인 홍 대표는 영농인으로도 손색이 없었으며. 눈에 보이는 아로니아의 풍성한 수확은 이를 증명해주었고, 영농 가로서의 자질도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판로개척을 위한 노력과 가공제품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제2의 인생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또한, 시작과 함께 홍 사장의 농장에서 생산되는 아로니아는 전국 유명백화점과 대형 유통업체에서 판매되기 시작되고 홍 대표의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11월부터는 중국에 수출이 시작되며 세계에 진출하는 사업가로 첫발을 내딛기도 한다. 42만 인구의 충칭시의 대형백화점의 2000평 대형백화점에 판로가 트이고, 우수한 제품으로서의 인정을 받아 추측이 힘들 정도 수익보장이 되는 시장이 확보되어 가고 있다. 또한, 수출을 통한 성장과 함께 제품개발에도 시간과 자본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지금은 아로니아 발효 효소, 잎 차. 식초, 아로니아 주, 아로니아 분말 효소 등 제품개발을 통한 사업확장에 몰입하고 있다. 불굴의 의지인 홍 기풍 대표가 나주인의 기개와 저력을 세상에 떨쳐가고 있다. ‘1등을 할 수 없으면 관심도 갖지 마라!’라는 신념과 철학을 실천하며, ‘아직 시작일 뿐이다.’라고 강조하며 지인과 후배들에게 ‘꿈과 도전을 소홀히 하지 마라.’라는 인생 철학을 전한다. 곳곳 눈에 띄는 자랑스러운 나주인들이 나주의 꿈을 이뤄나가고 있다. 문화도시에 에너지 혁신도시가 들어선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지금까지 나주에서 잠들어있고, 새로이 싹트는 모든 희망이 하나둘 꽃 피고 찬란했던 나주의 재탄생을 기대해 보자.              <나주토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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