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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교육
  • 기자명 신동운

현애원 출신 멍에 벗고 대한민국 축산업계 대모로 ‘우뚝’

  • 입력 2013.11.29 11:06
  • 수정 2013.12.1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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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자 부회장 “금성산 꼭대기 가야겠다면 가야지, 가다가 내려오면 되나요?”

 
“엇? 김영자 씨, 맞으십니까?”
분명히 여장부라고 들었고, 통화를 할 때도 쩌렁쩌렁하기는 했지만 여성임에 틀림이 없었는데 약속장소에 나타난 그녀는 짧게 깎은 머리에 스포츠점퍼를 입은 남성 그 자체였다.
의아해 하는 취재진에게 “7월 24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소 값 투쟁하느라 밀어 불었습니다.”라며 특유의 너털웃음을 짓는 전국한우협회중앙회 김영자(54)부회장을 나주시 노안면 농민상담소에서 만났다.
거듭된 취재요청에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해야 하니까 점심때 햄버거나 사갖고 오시오. 한우 햄버거로요.” 하는 그녀에게 굳이 점심끼니로 햄버거를 추천한 이유를 물었다.
“이 햄버거에 들어가는 고기가 한우협회에서 직접 검수한 한우고깁니다. 맛이 있나 없나 우리도 먹어 봐야 고객들 입맛을 알 것 같아서 기회 되면 종종 먹습니다.”
결국 그녀의 식성과 입맛마저 한우사랑, 한우자랑이었던 것.
조금은 특별한 출생기록과 이력을 갖고 있는 그녀이기에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지만 그녀는 추호도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성장과정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전남 강진이 고향이었던 아버지가 일본 징용에 끌려갔다가 한센병(나병)을 얻어 귀국하자 할아버지는 다른 가족들의 혼삿길과 출세에 걸림돌이 될까 우려한 나머지 아버지를 사망신고를 해버렸다.
결국 호적도 없이 소록도에서 현애원으로 한센병환자 정착촌을 전전하던 아버지가 현애마을에 정착하면서 결혼을 하고 그 결실로 김영자 씨를 낳게 된 것.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출생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김영자 씨는 강진 본가의 작은아버지 호적에 입적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나왔다.
중학교까지는 어렵사리 졸업을 했지만 고등학교 갈 형편이 안 돼 다시 현애마을로 돌아와 품팔이를 하며 독학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17세 되던 해, 오막살이집과 아버지가 진 빚 300만원, 그리고 돼지 한 마리를 끌고 동생 넷과 함께 현애마을을 나와 독립을 했다.
그때 삶의 목표는 오로지 아버지가 진 빚 300만원을 갚은 데 두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던 중 80년 6월, 당시 한갑수 씨의 주선으로 현애마을 주민들에게 소 입식자금 42만원을 융자해준다 할 때 아버지는 겁이 많은 분이라 못한다 했지만, 김영자 씨는 덜컥 소 두 마리 값을 융자를 받았다. 그렇게 시작한 한우농사가 오늘에 이르러서는 750마리에 이르게 됐다.
김 씨는 소를 키우는 틈틈이 축산신문을 읽는 것으로 세상에 대한 정보와 축산의 노하우를 터득해 나갔다. 그러면서 신문에 공고된 축산관련 심포지엄과 교육에 참가하기 위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축사일을 마치고 광주공항에서 비행기로 서울에 올라가 대한민국 축산업의 현주소를 느끼고 체험했던 것.
그 당시의 경험에 대해 김 씨는 “그때 사람들이 제가 하루가 멀다하고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오간 사실을 알았으면 쥐뿔도 없는 주제에 호사한다고 손가락질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더 큰 대한민국의 축산을 알고 싶었고, 그 꿈은 이뤄졌다고 봅니다.”
김 씨는 대한민국 식육기술학교가 개학할 당시 1기생으로 입학해 30명의 수련생이 여의도 광장에서 골발시범을 펼쳐 보일 때, 방송이며 신문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터지던 현장에서 인터뷰 하나로 전국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다지 말을 잘 한 것도 아닌데 다른 출연자들에 비해 솔직하고 자신감 있게 인터뷰에 응했던 것이 먹여들었던 것 같다고 말하는 김영자 씨.
그 뒤 그녀의 치열했던 삶의 여정이 한 여성잡지에 대문짝하게 소개되고, 이를 보고 주요 방송들이 5부작, 특집방송으로 그녀를 앞 다퉈 취재하기 시작하면서 일약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됐다.
군대에서, 교도소에서 편지가 쇄도하고, 전국 각지에서 함께 일을 해보겠다며 막무가내로 가방을 짊어지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한 때 축사 밖이 장사진을 이룰 때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만큼 치열하게 살아온 삶이었기에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사회적 기부행위가 된다고 여겼던 것.
김영자 씨는 지금도 자신이 현애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부끄럽다 여기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열심히 사는 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고, 사지 멀쩡한 사람들이 일을 안 하고 지내는 것에 대해 경종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 씨는 비록 54년의 인생이지만,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얻은 교훈이 있다.
“내가 건강한 부모님한테서 태어나지도 못했고,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제대로 할 수도 없었지만, 하느님은 내가 노력한 만큼 물질을 주셨다. 하느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어릴 적 성당을 다니던 그녀에게 한 수녀가 “요세피나(김영자 씨의 세례명)는 삼손의 힘을 가졌다”고 한 말이 마중물이 되어 그녀는 “하면 할 수 있다”는 힘을 갖게 되었고, 지금 그녀는 대한민국 축산업계 대모(代母)로 우뚝 서 있다.
1997년 전도유망한 화가였던 고향 선배와 맺었던 백년가약이 너무도 다른 성격차이로 인해 파경을 맞게 되었지만, 아들만큼은 “나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그녀는 ‘아들바보’다.
젖먹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도청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해 젖을 먹일 때 한 도청 간부가 “네가 느그 엄마 우세 다 시킨다” 하던 말에 발끈하기도 했던 그녀. 아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위해 밤에는 직접 영어학원을 다니며 회화를 배우고 있다.
“자식에게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나 자신에게도 투자(공부)한다”는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세한탄을 하거나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금성산 꼭대기에 올라가야 겠다 마음먹었으면 꼭 가야지, 도중에 내려오는 일을 내 인생에 없다”는 것이 그녀의 신조이자 또 그녀가 살아온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빚을 갚기 위해서 소를 키웠고, 그것이 그녀의 인생이 되었지만 결코 소를 키우는 일이 적성에 맞아서 한 일은 아니라고 말하는 김영자 씨. 그녀는 대한민국 축산업 발전을 위해 더 비전을 기획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한우부인 김영자 씨, 그녀에게 미래는 아직도 도전이고, 올라야 할 금성산 꼭대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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