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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73주년 특집 나주를 빛낸 5명의 독립유공자

  • 입력 2018.08.21 09:17
  • 수정 2018.08.2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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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73주년 특집 나주를 빛낸 5명의 독립유공자

독립유공자 세 번째 훈격 독립장 수여자 김태원, 나월환, 조정인, 김율, 박사화

애국지사 안중근은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것이 국인의 본분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안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 즉, 자신의 안전과 이득을 뒤로하고 목숨 바쳐 국가를 위해 희생 고귀한 분들이 있기에 지금 대한민국의 존재와 함께 삶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다.
광복절 73주년을 맞이하여 나주가 낳은 독립유공자 89인 중 독립유공자 세 번째 훈격인 애국장을 수여한 5인의 애국지사를 소개하며, 그들의 고귀한 애국정신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기대해본다.

 
1. 김태원 (金泰元)
김태원은 1870년 9월 16일 전남 나주시 문평면 갈마리(文平面 渴馬里)에서 출생하였다. 한 말의 의병장으로 호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창읍과 영광, 나주, 함평 등의 일본군을 공격해 명성을 떨쳤다.
호 죽봉(竹 峰). 본명 준(準). 전라남도 나주(羅 州) 출생이다. 순릉참봉(順 陵 參 奉)으로 있을 때 일제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어지자 1906년(광무 10) 호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창읍(高 敞 邑)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공격하여 이를 격퇴했으며, 영광(靈 光)의 적을 기습하였다. 1907년(융희 1) 기삼연(奇 參 衍)이 일으킨 호남창의회맹소(湖 南 倡 義 會 盟 所)의 선봉장이 되어 나주·함평(咸 平)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1908년 동생 진(津)의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창평(昌 平)에서 일본군 요시다[吉 田 勝 三 郞]가 인솔하는 기병 150명과 격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요시다의 군도를 빼앗아 그의 목을 베었다. 같은 해 나주에서 일본군 대부대의 기습을 받고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나월환
본관이 나주로 호는 송죽(松竹)이며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죠[成城] 중학을 거쳐 아오야마[靑 山]학원에 입학, 재학 중 무정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32년 중국 상하이[上 海]로 망명,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한국혁명당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무정부주의자로서 일본에서 박 열(朴烈)과 함께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6년 중국의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혁명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던 도중, 청도(靑島)에서 탈출하였다. 1939년 10월 중경(重慶)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광복군 제5 지대장으로 활동하다 살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조정인(趙正仁)
나주(羅州) 출신으로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에 이어서 대한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자, 더 이상 일제의 만행과 내정간섭을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의거에 기치를 올렸다.
1907년 12월 6일 호남 의병장 김태원(金泰元, 金準)·기삼연(奇參衍)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총기 4백여 정으로 무장시켜 헌병대 및 경찰과 접전을 전개하여 크나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 6월 나주 가산(佳山)에서 의병 심수근(沈守根)과 함께 의병운동에 사용할 탄약을 제조하던 중에 일본헌병대에 체포당하였다.
그 후 광주지방에서 소위 내란죄의 주모자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구 복심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고 다시 대심원(大審院)에 상고하였으나 역시 기각되어 1909년 1월 18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4. 김율(金聿)
나주(羅 州) 출신으로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 巳 條 約)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에 뜻을 두고 이듬해 10개월 형 김태원(金 泰 元:金 準)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기삼연(奇參衍) 의진(義陣)에 투신하였다. 이후 의병장 기삼연을 중심으로 호남창의맹(湖 南 倡 義 盟)의 핵심 역할을 하면서 장성(長 城)·무장(茂 長)·법성포(法 聖 浦)·고창(高 敞)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 가운데 특히 1907년 12월 법성포 주재소 습격 시에는 많은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강화하는 한편, 사창(社 倉)까지 점령해 군량미 조달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908년 1월에는 기삼연과 함께 함평(咸 平) 주재소를 기습해 일본인 경찰을 사살한 뒤, 그해 2월 기삼연이 체포되어 순국하자 김태원과 함께 의진을 지휘하며 나주·광산(光 山)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일본군을 공격하고, 이어 창평(昌 平)에서 일본군 기병대를 습격해 대승을 거두었으며, 같은 해 광산군 송정읍(松 汀 邑)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감금 상태로 나주전투에서 전사한 형 김태원의 시신을 확인하러 가던 길에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피살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5. 박사화(朴士化)
일명은 사과(士 過)·사홍(士 弘)으로 나주(羅州) 출신이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1908년 2월 전라남도 함평(咸平)에서 거의 한 심남일(沈南一) 의병부대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심남일 휘하의 중군장(中 軍 將)으로서 같은 해 3월 강진(康 津)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수십 명을 살상하고 무기를 노획하는 등 남평(南 平)·능주(綾 州)·영암(靈巖)·나주(羅州)·장흥(長 興)·해남(海 南)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며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뒤 1909년 가을까지 15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남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항쟁을 계속하는 한편, 친일 관료와 밀정을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활발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호남지역 의병을 초토화하기 위한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 伐作戰)을 전개함에 따라 150여 명의 부하를 구하기 위해 자수하였다.
그 후 탈출에 성공하여 다시 의병항쟁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10년 5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12년 7월 순국하였다. 199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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