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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기자명 김지선 기자

최초 귀화 독일인 프리츠 호만 ( Fritz Hohmann ) 선생 추모제 열려

  • 입력 2018.05.18 02:10
  • 수정 2018.05.18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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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귀화 독일인 프리츠 호만 ( Fritz Hohmann ) 선생 추모제 열려

  호만 영부(靈父)로 불리며 대한민국 청소년을 세계 석학으로 길러 낸 기술 교육계 영웅

 
 
1964년 나주 호만애암교를  방문한 당시 박정희 대통령
 

   지난 12일 다보사에서 호사모(호만애암을 사랑하는 모임)주관으로 최초 귀화 독일인 프리츠 호만(Fritz Hohmann 이하 호만영부)선생 추모제가 열렸다.

 이날 추모제에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박사 기업인 등의 호만영부의 애제자, 동문 등 축하객 30여명이 참석하여 선생의 큰 뜻을 기리며 감사를 표명했다. 추모제에 참석한 한 인사는 '이렇게 훌륭한 업적을 남긴 분이 나주에 계신줄 처음 알게되었다.'하며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진실에 대해 나주시민으로써 부끄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전했다. 전해들은 남기봉 회장(전 동신대학교 교수)과 김희성(가보팜스 대표이사) 추진위원장은 꾸준한 추모사업을 통해 호만영부님의 뜻을 기리겠다고 약속했다.

  호만영부는 대한민국에 최초로 귀화한 독일사람으로 1908년 서독 캇셀시에서 탄생 1967년 대한민국에 귀화한 후 1982년 3월 독일하노바에서 향년 73세로 별세 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이 한국 나주에 묻힌 분이다. 그는 1959년 호남비료 나주공장을 세울 때 건설 고문으로 파견되어 온 것으로 한국과의 첫 인연이다.

 그는 한국청소년 교육을 통해 독일의 기술문화를 한국에 도입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한두 명의 청소년에게 가정교사식 교육을 하기 시작 1962년 호만애암이라는 고등학교 수준의 기술학원을 설립하고 1965년 문교부로부터 고등기술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정신교육 없이는 기술교육없다.'라는 신념으로 전인교육을 위해 교훈을 정확, 근면, 검소, 친절, 네 덕목으로 정하고 한 학급 정원을 16명으로 하여 8명씩 격주제로 기술과 교양을 균등히 학습시키는 전대미문의 특수학교를 시도했다. 다재다능했던 그는 노래, 음악감상, 시, 연극 등을 직접 지도하고 소풍, 행군, 야영, 해수욕 등을 함께 함으로써 정서교육에 만전을 기했다.

 그의 관사는 학생들과 담소, 오락, 상담 등의 장소로 완전히 개방하여 학생과 혼연일체가 되어 호흡을 같이했고 전교생 기숙사 생활을 의무화하여 전 생활이 그대로 교육의 장이 되게 하였으니 학생과 교사들 사이에는 거리가 없었고 학생들은 항상 밝고 생기가 넘쳤으며 원근 제방에 교육 천국이라는 찬사가 두루 회자되었다. 국내외 독지가들이 각종시설을 돕겠다고 했지만 '무에서 유가 나올수 있어야 그러한 교육기관이 도처에 설립될 수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기종시설인 향교와 호남비료공장 등의 시설을 이용했다.

 그의 생활은 검소와 절약 바로 자체였고 학생부담 학비는 전액 면제를 원칙으로 하고 학교운영비는 독일국에서 나오는 그의 전 봉급과 한국정부로부터 나오는 다소의 보조금으로 충당했다. 광주 여수 해남 안동 마산 서울 등지에 호만애암분교가 설립됐고 최근 그의 고향 하노바에 호만애암한국 청소년 후원회가 설립됐다.

  그는 1964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장과 문화훈장을 받았고 1965년에는 대통령과의 호만애암 방문이 있었으며 1967년 그가 한국 국적획득 신청서를 낼 때 대통령이 직접 그의 신원보증인으로 서명할 만큼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도 받았다. 73세의 노구로 고향 하노바에 갔다가 별세했는데 나의 나라 나주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니 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는가 짐작이 간다. 유언대로 그의 유골은 6명의 박사를 포함한 국외 2백 국내 3백여 명의 제자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제2의 고향 한국에 돌아와 나주 땅에 묻혔다.

<김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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