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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경제
  • 기자명 나주토픽

살아있는 사마교의 전설, 관광개발을 묵묵히 기대하고 있는 사마비

  • 입력 2017.12.16 11:00
  • 수정 2017.12.16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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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사마교의 전설, 관광개발을 묵묵히 기대하고 있는 사마비

종 목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
명 칭 사마비 (駟馬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지정(등록)일 1984.02.29
소 재 지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8 (과원동)
시 대 조선

고려 현종 2년(1011) 거란이 쳐들어오자 왕은 수도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이곳 나주에서도 10여일 동안 머무르는 일이 있었다. 왕이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지나갔는데, 그 때부터 이 다리를 ‘사마교’라 불렀으며, 조선시대에 와서 고을 현감이 이 다리를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비를 세워 놓았다.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받침돌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둘렀고, 머릿돌에는 구름무늬를 가득 새겼다. 비몸 앞면 위쪽에는 ‘사마교비’라는 비의 명칭을 가로로 새겼고, 앞뒷면에 걸쳐 비문을 새겨 놓았는데,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가 힘들다.비문에 의해 조선 효종 4년(1653)에 비를 세웠음을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이곳으로 물이 흐르지 않아 다리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 사마교비
다리가 있었던 곳에는 현재 아무 흔적도 없으나 1872년 나주고지도를 보면 금성산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다보사 골짜기와 오두재(오도재) 골짜기 물이 합쳐져서(합치는 지점에는 운영지라는 큰 못이 있었다.

이 부근은 대곡(大谷)이었다.) 성내로 흘러 들어와 한줄기는 지금의 나주천(조선시대는 완사천)으로 또 다른 한줄기는 나주향교 앞을 지나 금성관 뒤쪽으로 흘러 지금의 나주5일 시장 터에 있었던 인덕지(仁德池,인덕지에는 나주목의 동사정東射亭이 있었다.)로 들어갔다. 사마교는 인덕지로 들어가는 개울 위에 놓여진 다리였던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다리가 좁아 백성들이 사람다리를 놓았다는 말도 있으나 근거는 없다.
 

▲ 안내판
▲ 송덕비군

금성관 주위 비석군 
1970년대 남산공원에 있던 목사, 관찰사, 현감의 선정을 치하하는 선정비를 모두 금성관 주위 현재 위치에 다시 세웠다. 이 가운데 특징적인 비석은 고려시대 현종이 거란의 난을 피해 나주에 왔다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갈 때 사마교라는 다리를 건넜는데, 사마교를 중수하고 그 사실을 기록한 사마교비(駟馬橋碑)와 1894년 동학이 진압된 이후 장성의 유림 송사 기우만이 찬한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 그리고 특이하게도 조선 후기 안동김씨 세도의 정점이었던 김좌근의 영세불망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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