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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표해록을 남긴 금남(錦南) 최부(崔溥)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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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16  01: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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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표해록을 남긴 금남(錦南) 최부(崔溥)

표해록에 나타난 조선의 선비정신 세계 정신사에 있어서도 특기할 가치 지녀

 
   
 

   
 

지난 13일 나주문인협회 주관으로 가장 오래된 표류기행문이자 중국 3대 기행문의 하나인 표해록의 저자 금남 최부선생 국제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다. 94호에 나주토픽이 만난 사람에서는 중국에 조선의 선비정신을 떨친 최부[崔溥]선생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최부 선생의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 나주 출신. 아버지는 진사 최택(崔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8(성종 9) 성균관에 들어가 신종호(申從濩)와 더불어 문명을 떨쳤고, 김굉필(金宏弼) 등 동학들과 정분을 두터이 하였다.

  1482년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곧 교서관저작·박사, 군자감주부 등을 역임하였다. 1485년 서거정(徐居正) 등과 동국통감편찬에 참여, 그 속의 논() 120편의 집필을 담당했는데, 그 논지가 명백하고 정확하다 하여 칭찬을 받았다.

그 이듬해에는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완성하는 단계에서 참여하였다. 이 해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이어 홍문관교리로 임명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1487년 제주 등 3읍의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제주로 건너갔는데, 거기에서 다음 해 초에 부친상의 기별을 받고 곧 고향으로 급히 오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다. 이때 43인이 탄 배는 14일 동안 동지나해를 표류하다가 해적선을 만나 물건을 빼앗기는 등 곤욕을 치르고 결국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台州府臨海縣)에 도착하였다.

처음 왜구로 오인되어 몰살당할 뻔했으나 어둠을 틈타 빠져나와 조선 관원이라는 것을 간신히 승복시켜 일행은 북경으로 보내졌다가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그는 상신(喪身)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상복을 벗을 수 없다고 고집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유가의 예와 윤리의 원칙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성종은 8,000리 길을 거쳐온 중국 땅에서의 견문을 기술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그는 남대문 밖에서 8일간 머무르면서 기술했는데 이것이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3권이다. 그리고 곧 고향으로 달려가 여막을 지키다가 또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삼년상을 지냈다.

1491년 지평에 임명되었는데 사헌부에서 서경(署經)을 거부하여 1년 후에 홍문관교리로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말썽이 많아 결국 승문원교리로서 낙착되고 말았다. 말썽의 골자는 친상을 당한 그가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로 곧장 고향으로 달려가야 할 것인데도, 아무리 군명(君命)이라 할지라도 한가하게 기행문이나 쓰고 있었던 것은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관직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로 찬성과 반대가 들끓었는데, 성종의 두호에도 불구하고 그의 임명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사헌부·사간원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행정부 및 홍문관의 세력과 대립한 데에서 빚어진 바 컸다.

그 뒤 그는 연산군 때 일찍이 중국에서 배워온 수차(水車) 제도를 관개(灌漑)에 응용하는 시도도 했고, 또 질정관(質正官)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연산군의 잘못을 극간(極諫)하고 공경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하다가 무오사화 때 화를 입어 함경도 단천으로 귀양갔으며 여기서 6년을 지내다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그의 표류기는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도쿠가와시대(德川時代)에 여러 가지 판본과 사본이 통용되고 있었으며, 일본어 번역본까지 나왔는데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1769(영조 45)에 간행되었다.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최부의 중국 표류와 표해록

최부(崔溥) 선생은 성종 1487(성종 18) 제주3읍 추쇄경차관으로 부임하였다가 다음해 윤정월 초,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제주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그와 그의 수하 43명이 탄 배가 표류하여 14일간의 천신만고 끝에 절강 연해에 표착하였다. 그 과정에서 두 차례나 해적을 만나 겨우 탈출하여 상륙하였으나 다시 왜구로 오인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뒤에 비로소 조선 관인의 대우를 받으며 호송을 받게 되었다. 임해 도저소에서 출발하여 영파·소흥을 지나 운하를 따라 항주·소주 등 번화한 강남지방을 지나고, 양주·산동·천진을 거쳐 북경에 도착하여 명() 효종(孝宗)을 알현하였으며, 북경에서 다시 요동반도를 거쳐 약 6개월 만에 압록강을 건넜다. 이전까지 조선인으로서 중국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강남지방(강소성·절강성)과 산동지방을 여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금남은 서울에 도착하자 성종의 명으로 청파역에 일주일간 머물면서 그 견문기를 일기체로 써서 바쳤다. 이 책이 표해록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표해록이라 이름 지은 것은 아니다. 최부가 처음 쓴 초고는 '중조견문일기(中朝見聞日記)'라는 제목이었는데, 뒤에 간행할 때 굳이 '표해록'이라는 제목을 붙인 까닭은 그의 중국 여행이 원래 왕명에 따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의 내용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 과정과 상륙 후 중국의 내지를 여행하게 되었던 과정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분량 면으로 대비해 보면 해상 표류기는 실제로 내륙 견문기의 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오늘날 이 책은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전자 쪽에 비중을 두어 '해양문학'으로 취급되기도 하고, 혹은 후자 쪽으로 분류하여 '연행록'이나 혹은 '중국견문기'에 포함되기도 한다.표해록이 해양문학에 속하건 중국 견문기에 속하건 간에 그 속에 일관되게 드러나는 것은 조선의 선비, 즉 최부의 도학자적 정신이다.

중국에 떨친 조선의 선비정신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10여 일 동안이나 사투를 벌이면서도 최부선생은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한시라도 망각하지 않았다. 예컨대, 심한 풍랑을 만나 좌초의 위기에 처하자 뱃사람들은 애당초 궂은 날씨에 출발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항의한다. 그리하여 지금이라도 기도를 올려 하늘의 노여움을 달래야 한다면서 최부선생에게도 함께 기도할 것을 권하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다. 유교의 이치에 닿지 않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 해안에서 해적 - 기실 왜구를 방위하는 군인들이었으나 그들은 곧잘 해적으로 돌변하곤 했다 - 둘을 만났을 때, 뱃사람들이 최부로 하여금 상복 대신 관복으로 갈아입어 의젓한 자세를 보여 주자는 요청을 하지만 그것도 거절했다. 예에 어긋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일행이 북경에 당도하여 황제를 알현했을 때 예부(禮部)에서는 최부에게 마땅히 상복을 벗고 길복으로 갈아입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그는 상주 신분으로서 상복을 벗는 일은 효에 어긋나므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양자 사이에 효가 먼저니, 충이 먼저니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황제를 알현할 때만 잠시 길복으로 갈아입는다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조선의 일개 선비가 '대명(大明)'의 예부와 맞서 예를 논한 것이었다.

최부 선생은 표해록을 통하여 조선 선비의 투철한 예교사상을 십분 표출하고 있다. 중국의 관인(官人)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는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와 긍지를 피력하는 가운데 고구려의 강성을 자주 언급했던 것이다.

견문기를 넘어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표해록은 최부가 제주도 앞바다에서 불의에 태풍을 만나 천신만고 끝에 동중국 연해지역으로 표류하여 조선시대 누구도 가보지 못한 강남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와 쓴 기행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동중국해 해상 표류기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중국 강남지방 견문기이다. 황해와 동중국해 연안지역은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에 잦은 왕래로 친숙한 지방이었다. 여기에 산재해 있는 '신라''고려'가 붙은 지명을 지금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9세기 전반 장보고 선단이 동아시아 해상을 종횡으로 누빌 때 일본인들도 신라상인의 배를 얻어 타고 내왕하였던 사실은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최부 선생의 표해록에 나타난 조선의 선비정신은 동아시아 3국에만 한할 것이 아니라 세계 정신사에 있어서도 특기할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주토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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