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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정신을 세계에 떨친 자아극복의 대명사 금하장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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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30  01: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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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정신을 세계에 떨친 자아극복의 대명사 금하장학회 회장

 

신학문과 기술을 신문명을 깨우쳐 국가경제와 교육에 헌신한 전설의 주인공

 
   
 
 

봉황초등학교 꿈자람 글방 역사관 액자에 ‘1. 자기가 자기의 학문을 자기가 시습(時習)할 것 2. 자기가 자기의 의식주를 자기가 해결할 것 3. 자기가 자기의 몸을 자기가 수신(修身)할 것 4. 자기가 자기의 집을 제가(齊家)할 것 5. 자기가 자기의 나라를 자기가 치국(治國)할 것이라는 교훈(敎訓)이 걸려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나주시 봉황면 철전리 철야마을에서 태어나 나라 잃은 슬픔은 뒤로하고 끼니마저도 걸러가며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며 재벌로 성장한 나주의 자랑이자 전설로 기억되고 있는 금하 서상록(徐相祿, 1910~1996) 금하장학회장(이하 서회장)의 교훈이다.

 

이미 오랜 전설로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지만 서회장은 흔적은 일본사회와 지역 후배들에게 큰 별로 기억되고 있음은 물론 그의 나라사랑, 고향사랑 그리고 후학양성 정신과 기록들은 영원히 나주정신의 비전을 제시해주는 자아극복의 모델로 남게 될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서회장의 큰 뜻이 단절되지 않도록 본지에 되새겨 본다.

  사업가인 서회장의 본관은 이천(利川), 이조판서인 지()의 후손으로 봉황면 철천리 철야마을에서 아버지 수원(洙元), 어머니 김제조씨(金堤趙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영세하였으므로 열여섯 살 되던 1925년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가 봉제공장, 제철회사 등에서 일하면서 관서(關西) 공업학교 야간부를 졸업하고 관서대학 2년을 수료했다.

하지만 서회장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은 많은 난관이 있었다. 당시 시골에는 가난은 기본이었고 교육도 받을 수 없는 여건 속에서 한자, 한문을 익혔다. 훈장님이 가르쳐주는 글자 하나하나의 뜻풀이가 오묘하여 종이가 흔하지 않던 그 시절은 땅바닥에서, 그냥 허공에 손가락으로, 나무판 습자판으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서회장이 16살 될 때 변화되는 신문화에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아 고민하다가 시야가 좀 더 넓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꿈을 꾸었고 신문명이 들어오는 일본으로 가기를 원한 것이다.

1926716세의 청소년기에 일본에 건너가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은 감히 몇 줄의 문구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무모한 것으로 억압받던 일제치하에서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각종 어려운 여건에서 자수성가한 서회장의 성공 후 지역사랑과 투자는 그의 인격과 인생관을 알려주기에 너무 부족하지만 나주인에게는 지역사랑과 굳은 신념으로 자아극복의 모델링이 되고 있다. 또한 그의 순수한 마음의 지역사랑과 조건 없는 교육투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지금도 서회장의 뜻을 이어받은 장남 서의열 회장은 금하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알려진대로 아쉬운 것이 있다면 시의 무관심 등으로 금하장학회가 나주에서 철수해 버렸다는 것이다.  일부인사의 전언에 의하면 순수한 의도의 투자가 왜곡 또는 부적절한 투자의 양론으로 나눠지기도 했지만 많은 아쉬움을 던져주기도 한다.

시모노세키에서 야마구치 현의 우베(宇部)탄광촌으로, 그리고 탄광촌 입소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일본에 정착하는 첫 관문이었다. 여기서 어느 정도 기술을 익히자, 기술자 대우를 받았으며 오후5시만 되면 퇴근을 할 수 있었고 생활의 여유가 생겨 잠시 귀국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에 철야 토박이인 부인 정봉금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결혼 1주일 만에 부인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건너온 선생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4세 되던 해에 부인을 일본으로 데려온 것이다.

10여 년 동안 일본인 회사에서 익힌 기술을 살려 28세 때 오사카에 이천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는데 이 회사가 후일 대기업으로 성장한 발판이 되었다. 이 업종은 각종 프레스 가공 및 성형이었다. 회사는 사장도, 직공도 자신이었고, 규모 또한 3평 남짓한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 출발했지만 기술과 신용을 바탕으로 일본인 사회에서 대성공을 이룬 드라마 자체였다. 본성이 성실하고 신용을 신조로 하였기 때문에 주위의 신망이 두터워 차츰 기업이 확장되어 방적공장, 기계공장 등을 설립하는 등 유수한 제조업체로 성장했다.

  조국이 한국전쟁으로 모든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던 그 시기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李承晩)박사가 특사를 보내와 조국재건을 위해 주요 산업시설의 복구를 요청해 왔으므로 고국에 투자를 서두르는 한편 대통령 특사가 귀국하는 편에 전쟁난민을 돕기 위해 광목(廣木) 800만 야드(20만필)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곧 인천에 이천전기(利川電氣)를 비롯하여 이천물산(利川物産), 이천중기(利川重機), 이천제강(利川製鋼), 알프스스틸회사 등을 세워 이천그룹의 총수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개인적인 이익에 집착하지 않고 공익사업에 공헌하고자 나주 고향으로 눈을 돌려 1952년에 나주고등학교와 1953년 봉황국민학교의 교사신축을 해주었으며, 철야마을에 전기, 전화가설을 비롯하여 도로의 개설, 그리고 나주교육청 도서관 건립, 나주 남산공원 조성과 최고정(일명 八角亭)을 건립했으며, 나주군민회관(일명 錦下會館)을 건립하고 재단법인 금하장학회(錦下奬學會)를 설립했으며 지속적으로 고향의 영재 육성에 기여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나라사랑과 고향사랑을 실천한 금하 서상록 회장의 도전과 대성공은 나주인의 기개를 만방에 떨친 명망가의 쾌거임에 틀림없다. 잠자는 대지를 깨웠던 그의 자력(自力), 자립(自立), 자주(自主)정신이 나주정신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나주토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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