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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금호공소포공(嘯浦公)나덕명’의 충효정신 <2>

  • 입력 2017.01.02 02:09
  • 수정 2019.10.23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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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공소포공(嘯浦公)나덕명’의 충효정신 <2>

  

소포공은 함경도경성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귀양살이 3년만인 1592년 4월 공의 나이 41세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앞 글은 72호 (1)과 겹친 글 입니다.>

이때 곽재우郭再祐, 고경명高敬命, 김천익(金千謚)등 목숨을 버리고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고 피난길에 오른 두 왕자를 왜적에 넘겨준 함경북도 회녕땅의 국경인 반역자 일파도 있었다. 이때 소포공은 의병을 일으켜 정문부와 함께 관북지방은 완전히 평정하였다. 

정문부는 막하 장병들의 전공과 함께 소포공의 전공도 자세히 기록하여 조정에 올렸다. 이공로로 公은 마침내 계사년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기축년부터 세어 햇수로 5년만이었다. 그는 갑오년에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자 고향인 나주로 돌아왔다. 고향에 온지 3년만인 병신년(1596년)에 아버지 금호공이 71세로 세상을 떴다. 公은 아버지 묘를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 주룡 망모산 아래에 쓰고 3년동안 시묘했다. 그 뒤 무안군 일로 주룡의 절벽위에 적벽정이란 정자를 짓고 나날을 보냈다. 

적벽정이 서있는 낭떠러지는 기암절벽아래 강물이 굽이쳐 흘러 풍광이 수려한 곳에서 책과 자연을 벗 삼아 소일했다. 정자 밑 바위 틈새에는 비들기들이 서식했다 해서 주민들은 鳩岩(구암)이라 부르며 강물엔 용을 길렀다 해서 용소라 부른다. 주룡住龍이란 마을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했다. 또한 소포공은 영산강 지류를 막아 저수지를 만들고 수백정보의 논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소포들이라고 불리는 무안군 일로읍에 있는 평야이다. 

公은 또한 영산강이 막혀 교통이 불편함을 알고 몽탄, 삼선, 주룡, 좌창등 네곳에 선박을 이용한 교통편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기해저병서(己亥低兵書)란 책을 저술한 公은 그 속에서 패정을 개혁하고 둔전을 없애며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민폐를 구할 정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公은 이처럼 난이 평정된 뒤에도 오직 국가와 지역사회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公은 경상도에서 맨 처음 의병을 일으킨 망우당忘憂堂 곽재우와 평소 교분을 두텁게 가진 사이였다. 두 사람은 적벽정 바위에 바둑판을 그려놓고 곧잘 대국했으며 곽재우는 公을 가리켜 ‘臥龍선생’이라 불렀다. 소포공嘯浦公 나덕명은 첫째부인인 담양부사 김경헌의 따님이신 광산 김씨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 번째 맞이한 부인인 부사절의 따님이신 문화 유씨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고 광해군2년인 1610년5월28일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순조때 윤광보가 임금께 장개를 올려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나주의 금호사와 충장사, 금산의 금곡사, 금성의 장열사, 무안일로의 소포사嘯浦祠에 각각 배향되었다. 금산대첩비에도 公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조상들의 효孝와 충忠을 바탕으로하는 호국정신을 기리는데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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