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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금호공소포공(嘯浦公)나덕명’의 충효정신 <1>

  • 입력 2016.12.19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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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공소포공(嘯浦公)나덕명’의 충효정신 <1>

 

나주터미널 뒤편에 가면 조선중기 효자 나주나씨 금호공 나사침, 금호공(錦湖公) 사침과 6부자를 배향하는 금호사(錦湖祠)가 있다.

‘북관도 높은 하늘에 오고가는 저 구름아 기러기마저 무정하구나. 이 외로운 성이 어디 매인고 외로이 부모형제를 그리는데 가을밤은 깊어 촛불마저 가물거리고 서리 맞은 낙엽소리도 처량하구나. 꿈에 본 연못가운데 수초가 잘 자라지 못하고 있으니 마치 내 신세 같구나.’ 함경도 추운 지방에서 유배생활의 심정을 읊은 소포공(嘯浦公) 나덕명의 시다. 소포공 나덕명(羅德明)公은 명종6년 신해년(1551년) 8월 8일 나주읍에서 좌찬성 사침, 파평윤씨(坡平尹氏) 언상(彦商)의 딸 사이에서 6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극지(克之), 호는 소포(嘯浦) 또는 귀암(龜菴)이다.

공이 29세인 1579(선조 1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의 벼슬을 하였고 후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끝난 뒤에는 고향에서 야인으로 보냈다. 저서로는 『소포유고』가 있다.

당쟁이 극심했던 이조시대에서는 반대파의 모함에 빠져 귀양을 많이 갔다. 귀양 중에 의병 활동을 한 것은 특이한 일이다. 죄가 있든 없던 간에 일단 귀양을 가면 죄인인데 죄인의 몸으로서 나라에 원망보다는 충성으로 의병대열에 앞장선 사람이 소포공 나덕명이다.

그의 아버지 금호공 나사침, 금호공(錦湖公) 사침은 16세에 어머니 병을 치료하기위해 손가락을 절단하여 피를 목에 넣는 효행을 하였고 아들 손자등 3대에 걸쳐 삼강(三綱)으로 일곱 번 장려를 받은 효와 예를 갖춘 명문집안이다.

공은 율곡이이(栗谷 李珥) 문하에 들어가 글을 익혔다.

후에 율곡선생이 공에게 주자어류(朱子語類) 한 질을 주시면서 율곡 이이선생의 추천으로 정개청의 문하로 옮겨 학문을 닦았으나 후에 귀양살이의 화근이 되었다.

공이 28세인 선조12년(157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박순(朴淳)의 천거로 승훈랑 의금부사(承訓郞 義禁莩事)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선조22년 기축년 공의 나이 38세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죄목으로 함경북도 경성(鏡城) 땅으로 귀양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여립사건은 전주사람 정여립이 전북진안에서 기인(奇人)ㆍ모사(謀士)를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반역을 도모했던 사건으로서 이로 인해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났다.

그 후 전라도는 반역지역이라 하여 등용이 제한되었다. 公의 7부자(七父子)가 감옥에 구속되었다가 아버지 금호공은 효성으로 정려를 받았다하여 특별히 사면되고 6형제가 각처에 유배되었다. 소포공은 함경도경성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귀양살이 3년만인 1592년 4월 공의 나이 41세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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