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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나주지역 동학과 의병운도으이 사료적 큰 가치를 지닌 고서 "나주 금성정의록"

  • 입력 2016.10.01 09:58
  • 수정 2016.10.0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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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지역 동학과 의병운도으이 사료적 큰 가치를 지닌 고서 "나주 금성정의록"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6호
명 칭 나주금성정의록 (羅州 錦城正義錄)
분 류 기록유산 / 전적류/ 필사본/ 고본
지정(등록)일 2006.12.27
소 재 지 노안면 용산리 545 노안면 용산리 545
시 대 조선시대

▲ 나주 금성정의록
나주 금성정의록(羅州 錦城正義錄)은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용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필사본 기록물이다. 2006년 12월 27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286호로 지정되었다
나주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은 나주의 유림이던 겸산 이병수(1855~1941)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관군편에서 적은 기록과 1895년 을미년의 의병 등에 관한 기록을 필사한 것으로 나주 지역 동학과 의병운동을 이해하는 사료적 가치가 크다.
목활자본으로, 2006년 12월 27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나주 유생 이병수(李炳壽, 1855∼1941)가 남긴 《겸산유고(謙山遺稿)》 제19·20권에 수록된 것으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래 3년간의 사적을 갑·을·병편으로 구성하였다. 갑편은 갑오년(1894), 을편은 을미년(1895), 병편은 병신년(1896)에 각각 해당한다.
저자는 동학농민군의 궐기를 맞이하여 나주의 수성(守城)을 위해 당시 나주목사 민종렬에게 도약소(都約所) 직월(直月)의 직임을 가지고 적극 협조하였고, 그 후 기우만(奇宇萬)이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창의하였을 때에도 교임(校任)으로서 이에 호응하여 나주 지방의 유생창의에서 활약하였다. 1918년 함평으로 이거하여 후진을 양성하다가 다시 31년에 나주로 돌아와 송산정사(松山精舍)를 짓고 한학을 전수, 많은 제자를 길렀다.
한말 유생으로서의 이병수의 생애를 볼 때 이 책은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과 근왕주의(勤王主義)를 기저로 하는 철저한 반외세(反外勢) ·반개화(反開化) ·반부패(反腐敗)의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입장에서 기술되었고, 동시에 반농민(反農民)의 보수적인 구법(舊法)수호에 철저하였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갑오년간의 동학농민군의 궐기에 반대하고 배척하는 관(官)과 유생의 수성군(守城軍), 민병활동과 반일(反日) ·반개화(反開化) 의병활동이 같은 맥락에서 취급되었다.
 

갑편은 나주지방의 동학대접주 오권선(吳權善)은 나주에서 나성군(羅城君)으로 4대에 걸쳐 책봉되어 세거(世居)한 세가(勢家) 출신이라는 사실을 비롯하여, 나주 수성군의 편성과 아울러 향약성책(鄕約成冊)을 경수(更修)하고 각 면의 약장(約長)에게는 <민호성책(民戶成冊)>을 수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나주에 진격할 때 전봉준과 민종렬 간에 일차적인 대좌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동학농민군의 퇴각과 함께 수성군의 활동 반경이 확대되는데, 광주 용진산(聳珍山)과 나주 금안동(金安洞), 초동(草洞) 호장산(虎壯山) 전투가 있었다는 것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농민군과 반농민군 간의 지방차원의 대결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다.
을편은 <초토사보군공별지(招討使報軍功別紙)> <본주인사하군공상(本州人士賀軍功狀)>과 기우만이 쓴 <토평후기증정장군서(討平後寄贈鄭將軍書)> 이외에도 지방제도 개편으로 동헌이 행정청으로, 진영(鎭營)이 경무관청(警務官廳)으로 변화된 사실, 개화파 계열의 지방관에 의한 단발령이 그 효과적인 추진을 위해 욕선교유(欲先校儒)하고자 하였던 데에 대해 유생들이 피신을 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병편은 기우만의 창의통문(倡義通文)과 그에 대한 나주 유생의 응답통문(應答通文), 그리고 단발령을 추진한 나주관찰부 참서관 안종수에 대한 10죄(罪) 성토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유생의 창의에 앞서 나주 성내의 읍리와 군교가 민요를 일으켜 안종수를 처단하고, 유생의병의 창의소가 그에 이어 구성되었다는 것, 기우만의 호남창의소 의려진(義旅陣)이 나주에 입성하는 과정에서 나주의 아전과 군교가 반대하여 기우만이 회진(回陣)을 하려 하자 나주 유생이 군교 등을 설득하여 합세한 것, 그리고 유생 의병진은 자신들과 정치적인 입장이 같은 지방관과는 의병활동에 대한 협의 공존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의병의 해산 이후 유생 의병진과 협력한 해남 ·담양의 지방관이 투옥, 살해되었다는 것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한말의 격변기에 대응하는 척사유생(斥邪儒生)의 의식 수준을 비롯하여 지방 차원에서의 활동과 그 대응뿐만이 아니라 동학농민군과 이서집단의 존재형태의 일단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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