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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교육
  • 기자명 나주토픽 기자

현유의 위패봉안, 배향과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된 유산 '남평향교'

  • 입력 2016.06.24 10:43
  • 수정 2016.06.2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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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도시 나주의 역사발자취 28

남평향교[南平鄕校]

지정종목 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 전남유형문화재 제126호
지정일 1985년 02월 25일
소장 남평향교
시대 조선
종류/분류 향교
크기 대성전 건평 200㎡, 명륜당 건평 215㎡
소재지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교원리 161-1

나주시는 영산강유역의 대표적인 고을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나주의 문화재 가운데
유교 유적이 차지하는 비율을 다른 유적과 비교하면 많은 편에 속한다. 특히 나주향교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사학기관이었던 서원 사우(書院 · 祠宇) 는 사액서원 [賜額書院] 사우만 6개소에 달하며 이는 조선시대 나주사림들의 활발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명륜당

1945년 이전에 건립된 유교문화재를 대상으로 <문화유적 지표조사>와 <전남의 향교>, <전남의 서원사우>등 여러 문헌자료를 기초로 한 자료에 의하면 남평 향교(南平鄕校, 유형문화재 제126호)는 남평읍 교원리 월연대(月延臺)아래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1420년(세종 2)에 남평현의 동문 밖 현 동사리(東舍里)에 건립되었으나 1534년(중종 29)에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전남유형문화재 제126호 남평향교는 1420년(세종 2) 창건되었고 대성전(大成殿) 건평 200m2, 명륜당(明倫堂) 건평 215m2. 1546년(명종 원년)과 50년(명종 5), 1695년(숙종 21), 1745년(헌종 원년), 1855년(철종 6), 1921년에 각각 중수(重修)했었다.

▲ 대성전

1420년(세종 2)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남평현 동문(東門) 밖에 창건되었다. 그 뒤 1534년(중종 29)에 남일리(南一里) 자고개尺峴]로 이건하였다가 1545년(인종 1)에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1600년 성균관과 남평현민들이 협조하여 지금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1695년·1745년·1793년·1835년·1855년에 각각 중수하고, 1921년과 1978년에 크게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흥선대원군불망비

소실(燒失) 전에는 대성전(大成殿),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흥학당(興學堂)·양사재(養士齋)·사마재(司馬齋)·제기고(祭器庫)·교직사(校直舍) 등이 있었으나, 당시 재정 형편 등이 고려되어 대성전(大成殿)·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교직사(校直舍)만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大成殿)에는 5성(五聖)과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이후 교육적 기능은 축소되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들이 운영을 담당했다.
이처럼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봉행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인 것이다. 경사지에 위치한 남평향교의 외삼문을 들어서면 배움의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뒤쪽의 내삼문을 들어서면 봉행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현재 남평향교의 운영진들은 한결같이 소실전의 동무(東廡)·서무(西廡)·흥학당(興學堂)·양사재(養士齋)·사마재(司馬齋)·제기고(祭器庫) 등이 재건축되어 교육적 기능 또한 아울러 복원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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