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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의 달 특집 나주를 빛낸 위인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 선생
나주토픽 기자  |  bgt0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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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6.10  11: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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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의 달 특집 나주를 빛낸 위인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 선생

호남 최초의 의병장으로 선조대왕으로부터 ‘창의사’라는 칭호와 호남의 대학자로 추앙받아

   
▲ 문열공 김천일 선생
매년 음력 5월 16일(금년 6월 20일)이 되면 나주 정렬사에서는 나주시장과 도·시의원을 비롯한 기관사회단체장, 배향문중대표, 향교유림회원, 문화원, 언론인, 학생, 군인 등의 참여와 함께 호남최초의 임란의병장으로 나주를 빛낸 문열공 김천일선생 추모제향이 거행되고 있다.

문열공 김천일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경기도와 강화도, 진주성 등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당시 선조대왕으로부터 ‘창의사’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호남의 대학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올해 6월 20일은 제424주년 되는 해로 창의 기병했던 날을 기념하여 호국정신과 애국심 고양 계기로 고인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호국의 달 6월을 맞이하여 나주토픽에서는 나주를 빛난 거인 문열공 김천일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보았다.

김천일(金千鎰 1537 : 중종32년 -1593 : 선조 : 26년)장군은 선조 때의 의병장으로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임진왜란 때 고경명과 함께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왕명을 받고 진주에 주둔하여 절도사 최경회 황진 장윤등과 사수하다 성이 함락되자 아들 성걸과 함께 남강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부인도 자진하였다.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열(文烈), 나주의 정렬사(旌烈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송천집(松川集), 문집에 건재집(健齋集)이 있다.

문열공 김천일선생은 군기시주부를 첫 벼슬로 출사했는데, 호남최초의 임란 의병장으로서 북상 진군하여 많은 군공을 세우셨으며, 1593년 6월29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아들 상건과 함께 순절하셨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607년 나주정렬사와 진주창열사에 사액되었고 1618년에 영의정에 추증됐으며, 1627년 문열의 시호가 내리고 1630년 충신정려 및 1745년에 부조묘의 은전이 내려졌다.

금성산 동편에 위치한 정렬사에는 문열공 김천일선생을 비롯하여 승지공 김상건선생, 충민공 양산숙선생, 관해 임회선생, 후조당 이용제선생 등 다섯 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1626년에 세워진 정렬사비(전남도 기념물 48호), 그리고 유물관등이 있다.

후세들에게 행동하는 지식인상으로 교훈을 주고 있는 선비 건재(健齋) 김천일. 집안은 대대로 창평 대산리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부터 나주시 흑룡동(현 나주시청 부근)에 거주하였다. 1537년 진사 김언침(金彦琛)의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다음날 어머니 이 씨가 세상을 떠나고 6개월 후에 부친마저 세상을 뜨니 생후 반년 만에 양친을 잃은 고아가 되어 외조부 이함에 의탁해 양육되었다.

문열공은 17세가 되도록 교육은 물론 문 밖 출입을 거의 못했으며 15세가 되어도 천자문을 배우지 못해 무지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18세에 김해김씨와 혼인한 후 19세 나이가 되어서야 당시 태인에 은거하던 일재(一薺)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8년 22세 때 생원 초시에 합격하였고, 선조 6년(1573년) 유일(遺逸)로 뽑혀 군기시 주부(軍器寺 主簿)를 첫 벼슬길에 올라 용현 현감 이후 강원도 도사,경상도 도사를 지내다. 이항의 상을 듣고 관직을 버리고 분상하다 임실 현감을 거쳐 49세 때 담양 부사에 제수되었다 선조 19년 봄 사임 후 나주에 귀향하여 극념당(克念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선조22년 한성부 서윤에 다시 기용되어 군자감정으로 옮기고 11월 수원부사로 부임하여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은 전세(田稅)를 내지 않고 힘없는 서민들만 과중하게 부담하던 폐단을 바로 잡아 땅주인에게 골고루 부과했다가 그들의 모함을 받아 이듬해 파직되어 나주로 낙향했다.

16세기 중반 호남의 남해안 해남 강진 장흥 완도 진도에는 잦은 왜(倭)의 노략질에 겁을 먹은 섬주민들이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었다. 구제해줘야 하는 관군은 퇴폐해 있고 관리들은 방어에 허술한 듯 하니 더욱 불안하던 차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92년 4월 30일 선조 서진, 5월 2일 경성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김천일은 고경명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한다.

51세의 나이로 임진년 5월에 기병,이듬해 6월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국하기까지 14개월간에 걸친 그의 전적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에서는 북상 기병 이후 수원.강화.한강 연안 등지에 거점을 두고 경성 탈환을 목표로 활약한 시기이며 강화도에 들어가 강화부사 윤담과 함께 해안성채를 보수하고 있을 때 선조가 문열공에게 장예원판결사 관직과 창의사(倡義使) 칭호를 내렸다.

2단계는 4월부터 남하하는 왜군을 추격 6월에 있은 제2차 진주성전투를 주도하던 시기의 활동이다. 6월 14일 문열공이 이끄는 의병은 진주성에 들어가 김해.창원까지 쳐들어온 왜군을 적대한다. 이 전투 때의 의병은 1만5천(진주관민 5만 여명), 적군은 8만 대군으로 난전을 치렀다.

6월 29일 전세는 기울어 졌고 폭우로 동문쪽의 성벽이 무너지면서 적은 개미떼처럼 성벽을 넘어왔고 이어 사북문도 무너지고 함락되고 알았다. 1593년 문열공은 장자 상걸을 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이 소식을 듣고 차남 상곤이 진주에 달려와 10여 일간 그들의 시신을 찾아 헤매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성이 함락되자 피하기를 권했지만 문열공은 순의(殉義)의 길을 택했다고 건재선생문집(健齋先生文集)이 전하고 있다.

국난극복을 위해 봉기한 그의 의병활동은 후손들에게 호국정신(護國精神)의 교훈을 주고 있으며 나라사랑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주토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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