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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기자

나주의 대바구니 100여년 역사 간직한 전수자 박승렬 옹

  • 입력 2016.05.04 16:59
  • 수정 2016.05.0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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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의 대바구니 100여년 역사 간직한 전수자 박승렬 옹

나주인 삶의 일부가 담겨져 있는 소중한 문화자산 대바구니에 희망을 불어넣고 싶다.

죽세공예품의 대명사 담양(潭陽)에서 만든 죽세공예품이 상품화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것은 지금부터 4백여 년 전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담양 군내(群內) 역사를 기록한 추성지(秋成志) 기록에 의하면 후손도 이름도 없는 김(金)씨라는 노파가 초가 단칸방에서 농한기를 이용하여 3년간의 연구와 실험 끝에 참빗을 만든 것이 죽세공예의 시발점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소쿠리 등 생활도구를 만들어 쓴 것은 이보다 훨씬 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쿠리 바구니 등 대나무 제품들은 인구가 밀집된 담양(潭陽)읍내로 집산되어 죽물(竹物)시장터는 대성황을 이뤘다. 일본인들은 조선을 침략한 뒤 담양의 죽제품이 동북아를 휩쓰는 점을 간파하고 1922년 국내에선 최초의 지선철도로 광주~담양간 철도를 부설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인구 1만 명 미만의 담양읍을 1943년 면에서 읍으로 승격시키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서민들의 생활수단의 일부가 된 죽물의 제작과 판매가 이뤄지는 죽물시장은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담양인의 물질문명은 물론 정신문화까지를 지배해 왔다는 데서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담양의 대바구니 문화가 나주에 전해진 기록은 없지만 경기도 남양주시에 거주하고 있는 문평면 출신 박진열(66)씨로 부터 ‘나주에서 100여 년 전 독특한 나주 대바구니를 제작 판매해 가업을 번창시켜 나아갔다.’라는 제보가 있어 근거를 찾아보았다.

▲100년 역사 간직한 대바구니

▲ 전수자 박승열 옹 부부


박 씨는 증조부 고(故) 박관순(일명 박종삼)씨가 100여 년 전 제작했던 대바구니(사진 실물 보관)를 제시하며 100여 년 동안 소중한 전통문화의 자산들이 시대 흐름에 밀려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나주 대바구니 흔적을 찾아 보전하고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사연 또한 소중한 자산임을 알림과 동시에 나주문화의 전파를 꿈꾸고 있다.

박씨 집성촌 약 40세대가 살고 있는 나주시 문평면 학동리 봉학부락,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던 70년대 이전 당시 생필품으로 없어서는 안 될 대바구니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은 자녀들의 교육은 물론 의식주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는 생계수단이었다. 또한 기술만 습득하면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대나무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다.

과정의 진위를 알아보기 위해 박 씨의 제보에 의해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대바구니 제작 전수자 박승열(87)옹을 찾았다. 사전 만남의 약속이 있었지만 세찬 봄비와 인적이 드문 시골집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노구에도 마을 입구까지 마중 나오신 노부부의 따뜻함에 감격의 마음속 깊이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바구니의 역사를 묻자 ‘난 아무것도 몰라. 아버지 때부터 하던 사업을 이어받을 뿐이다.’하며 겸손해 하시며 조심스레이 입을 열었다. ‘스물여섯에 대바구니 일을 시작해 30여 년 동안 생계를 위해 한 하루도 멈추지 못했다.’하며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했다. ‘80년 경 일감이 사라질 때까지는 달인에 가까운 장인으로 알려졌다.’라는 전언(傳言)에는 가벼운 웃음으로 답변했다. 반면 부인은 힘들었던 그 시절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4명이 자녀 중 두 아들은 은행장 두 아들은 현직 국가 공무원이며 사위도 군 고위츨신이라며 자식 자랑에 열중하셨다. 해방 전 후의 세대 끼니마저 잇기 어려웠던 부모들의 모습 그대로 였고, 그 시대의 고생했던 부모님들의 모습을 그려보니 잠시 숙연해졌다.

가난한 시절 전답 농사로만 자녀 교육이 힘들어 대바구니 제작에 손을 대기 시작했으며 농사일을 마치면 곧바로 작업실에 않아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대바구니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신이 소중한 문화자산의 소유자로 중요한 시대적 역할에 대한 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 채 한 가지 일에만 열중했었고 부인은 생산된 대바구니를 등에 지고 나주전역을 돌며 판매에 나섰다. 자녀들의 교육과 끼니를 이어가야만 했던 그들에게는 또 다른 선택의 폭은 매우 좁았다.

시골 작은 마을에서 농사 외에는 특별히 배운 재주도 없을 뿐 아니라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는 것 외에는 가진 것 없었던 당시의 상황이었고 지금도 고생했던 그 시절을 되새기며 가볍게 눈시울 붉혀보기도 한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고난과 가슴에 얺힌 사연들이 하나 둘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나타난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제품제작이 가능하시냐?’라는 질문에 힘들 것 같다는 대답을 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던 것이다. 박옹은 대바구니 역사 속에 숨어있는 자신과 부인의 노력을 자랑스럽게 표현하며 증조부로 부터의 죽제품 전수가 생업에 큰 도움을 주셨다며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제보자 박씨는 담양 대바구니의 원조론을 거론하자 ‘담양대바구니는 대나무 줄기를 이용해 매듭을 지었지만 나주 대바구니는 철사로 마무리를 지어 독특한 기술로 대바구니를 제작한다.’고 부언 설명했다. 나주 대바구니 제작의 우수성에 대한 설명과 함께 나주 전통문화를 보전하고 싶은 간절한 속내음을 들어내고 있었다. 나아가 단순한 대바구니에 얽힌 사연이지만 나주인 삶의 일부가 담겨져 있는 소중한 문화자산을 보존은 물론 가능하다면 전시를 통한 한 시대의 아픔과 극복과정을 교훈으로 길이 전하고 싶은 것이다.

나주인의 열정에 진솔한 마음으로 감사드리며 박 씨의 뜻이 성취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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