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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기자

학문과 인격의 강학처(講學處) 나주 쌍계정

  • 입력 2016.05.04 16:53
  • 수정 2016.05.04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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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인격의 강학처(講學處) 나주 쌍계정

조선시대 대표적인 학자들의 연구장소로 이용된 명소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에 있는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34호. 고려 충렬왕 6년에 문정공 정가신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 나주 쌍계정

금성산에서 내려온 계곡이 양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쌍계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73년 4월 21일 전남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문정공 정가신은 나주 동강면 시중동(지금의 인동리)에서 태어나 금안동에서 자랐다.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밀직학사, 정당문학 등을 지냈는데 문장에 능하고 청렴결백하였다.

당시 쌍계정은 고려 충렬왕 때 전고(典故)에 밝아 세자이사(世子貳師)와 세자사(世子師) 등을 역임하였던 정가신(鄭可臣)과 전주정(全周鼎)·윤보(尹珤) 세 사람이 함께 지어 강학처(講學處)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문정공 정가신과 문숙공(文肅公) 김주정(金周鼎), 문현공(文顯公) 윤보(尹珤) 등이 모여 학문과 인격을 닦던 곳이어서 삼현당(三賢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후 조선 세조 때부터 선조 때까지 정서(鄭鋤), 신숙주(申叔舟), 신말주(申末舟), 죽오당(竹梧當), 김건(金鍵), 홍천경(洪千璟) 등 당시 대표적인 학자들의 학문 연구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또한 쌍계정은 규약을 정하여 미풍양속을 지키도록 행하는 계회(契會)와 시회(詩會)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금안동은 원래 정가신이 이 고을에 들어오면서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한다.  금안동은 12개 동네로 구성된 호남의 대표적 양반 마을이었다.  금안동은 쌍계정을 중심으로 한 대동계가 지금도 시행되고 있으며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있어 공동체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

현재도 정가신의 후손 나주정씨(羅州鄭氏), 정서의 후손 하동정씨(河東鄭氏), 김건의 후손 서흥김씨(瑞興金氏), 홍천경의 후손 풍산홍씨(豊山洪氏) 등 4개 성씨가 대동계를 하고 있다.

근래에는 이 사성문중(四姓門中)에서 쌍계정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1957년에는 이들이 뜻을 합하여 ‘사성강당(四姓講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 4백살 보호수 느티나무

오늘날도 여름이면 서당을 열고 음력 4월 20일에는 계원들이 모여 선행한 사람을 가려서 상을 준다.
건물 형식은 방이 없는 대청형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1단의 낮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기둥을 세웠으며 포작(包作)이나 주두(柱頭) 없이 보와 장혀 도리로 짜맞추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사방이 터져 있는데 주변에 노거수가 우거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건물이 처음 지어진 때는 1280년이나, 이후 중수하여 처음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되었다.
건물 안에는 한석봉이 쓴 쌍계정 현판 2개와 쌍계정 중수기, 정가신, 정서, 홍천경이 지은 시가 걸려 있다.

이 쌍계정의 대들보 위에는 창고가 있는데 금안동의 향약이라고 할 수 있는 필사본 서책들이 보존되어 있다.  수차에 걸친 중수를 거듭하여 많은 변모를 가져오기는 하였으나, 고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박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정자 주위에는 대여섯그루의 느티나무 고목이 우거져 정취를 한층 높여주고 있으며, 편액의 글씨는 한호(韓濩)가 쓴 것이라고 한다.
<나주토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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