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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교육
  • 기자명 나주토픽 기자

나주에서 최초로 세워진 나주노안천주교회

  • 입력 2016.03.22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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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서 최초로 세워진 나주노안천주교회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 근대건축물로 옛 성당의 모습 그대로 보여줘

광주대교구 소속으로 나주에서 최초로 세워진 천주교회이며 전라도지역의 대표적인 근대건축물인 나주 노안 천주교회는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에 자리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옛 성당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이 건물은 붉은 벽돌의 조적조 건물로 맞배 형식의 붉은 아스팔트지붕을 씌운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나주지역의 대표적 근대 성당건축물로 2002년 9월 13일 등록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

 


1894년 천주교 신자 정락 요한이 박해를 피해 서울을 떠나 함평군 나산면에 정착하였다. 그는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약봉지에 천주경과 성모경을 써주며 신자들을 모아나갔다. 당시 양천리에서 한약방을 하던 이진서가 교리를 공부하여 양천리 이민숙(바오로), 이진서(토마스), 이학서(바오로)에게 전도하여 1900년 무안에서 요양중이던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계량공소가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후 1903년 목포 산정동본당의 두뇌(한국명 전학준)신부가 노안면을 왕래하면서 신도수가 1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런데 1900년 나주부근을 중심으로 한 인근에 본당을 설립하여 이주할 것을 결심하고 드애신부와 뚜르뇌 신부와 현지를 답사하고 여러 가지 조건이 맞는 노안 용산리 남산마을에 성당터를 잡았다.

그리하여 1906년 8월 남산에 1.5헥타르 땅을 350냥에 매입하고 1907년 6월 뚜르뇌 신부의 주거지를 사내에서 남산으로 옮기었다. 그러나 토지 전소유주가 묘를 이장할려고 땅을 파보니 시신이 그대로 있어 교회와의 매매계약을 파기하였다. 또한 마을사람들도 크게 반대하여 할 수 없이 다시 계량으로 계획을 바꾸어 "계량천주교회"하는 본당을 건립하였다. 1908년 계량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신부로 투르뇌 빅톨 신부가 부임하였다.
 

1910년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그 부지에 일자형 초가 성당을 건립하였다. 직접 벽돌을 만들어 사제관을 건립하던 중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건립이 미루어지다가, 1927년 벽돌조 사제관을 서구식 성당으로 확장하여 준공하였다.

노안천주교회의 성당 건물은 붉은색 벽돌로 마감한 외관에 아스팔트 맞배지붕을 얹은 단층의 서구식 성당 건물이다. 1926년에 박재수 신부가 부임하여, 1908년 프랑스의 카다르 신부가 지은 一자형 벽제 사제관을 1927년에 十자형 건물로 증축한 것이다. 정면의 탑신부 1층은 화강석으로 표면을 거칠게 마감하였다.

이후 1936년 김창현 신부는 논밭 수천평을 매입하여 학교 건물 2동을 건축하여 "신성학술강습원"이라는 4년제 보통학교를 신설 수백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 학교는 해방이후 노안초등학교의 설립 등으로 자연스럽게 폐교되었다. 1935년 5월 계량 본당에서 노안 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57년에는 밀려드는 신도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십자모양으로 성당을 확장 증축하고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또한 성모중학원을 설립하여 중등교육을 실시했으며 1961년 "성 골롬반 중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아 노안 문평 광산 삼도 등지의 학생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었다. 이 학교는 1984년 2월 29일 폐교되고 3월 까리따스수녀회의 분원이 개설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군인들이 교회에 불을 지르려고 했는데 언덕 위로 보이는 성당이 붉게 타올라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환상이었고 성당은 멀쩡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이 사건은 외국 선교사에 의하여 <타임>지에 보도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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