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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나주토픽 기자

만봉석산의 성공을 지역사랑 정신으로 승화시킨 이웃사랑의 실천가 김용화 대표

  • 입력 2016.03.05 10:56
  • 수정 2016.03.0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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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봉석산의 성공을 지역사랑 정신으로 승화시킨 이웃사랑의 실천가 김용화 대표

베품의 미학을 실천하는 봉사자로 남다른 지역사랑과 봉사정신은 지역민과 후배들의 귀감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한국 기적의 원동력은 불굴의 기업가 정신이며, 기업가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한 나라는 단연 한국이라고 했다. 일부에서는 한국의 경제성장이 정부가 주도적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한국의 경제성장은 정부가 주도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쟁의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관민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기업가 정신이 충일(充溢)한 기업들이 다수 존재해서 한국의 기적을 이룬 것이다.’라고 말했다.

▲ 김용화 대표

천연자원이 없어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신세계를 개척했던 대한민국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더 노력했었고 혁신으로 자원빈국을 극복한 대성공은 온 세계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50년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됐던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넘어, '세계 수출 순위 톱 10(최근 발표 7위)으로 우뚝 선 것도 자원 빈국이라는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킨 결과이다. 인정이 많으면서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역경에 강하며 부지런한 대한민국 국민이 이뤄낸 결과인 것이다. 대한민국 대표적 곡창지대 나주평야에도 대대로 따뜻한 인정미 넘치는 사랑으로 무장된 많은 시민들이 폭 넓은 활동으로 아름다운 나주를 가꾸어 나가고 있다.
나주토픽 54호에서는 나주시 봉황면 만봉리에 살고 있는 나주토박이 김용화(58) 대표를 찾아 친숙하고 구수한 동네 사랑이야기를 전해본다.
투박해 보이는 외모에 초면의 낯설음을 따스한 미소로 녹여주는 토박이 김 대표는 큰 재산가는 아니지만 베품의 미학을 실천하는 봉사자로써 자신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며 그의 남다른 고향사랑과 봉사정신은 지역민과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학업(조대공전)을 마칠 때 까지 부모님 슬하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큰 어려움 없이 살아오던 김 대표는 젖소와 벼농사 등의 복합영농 도중 인생 변화의 계기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만봉석산의 인수였다.
17여 년간 일본 수출을 목표로 만봉석산을 개발했던 A업체는 일본에서 요구하는 흠집하나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공산품(석자재를 타일과 같이 재단) 생산은 개발할수록 실망의 골만 더욱 깊어가게 했고 사업을 포기를 하게 된 것이다. 끝까지 자연석 개발을 권유한 김 대표의 석재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식견을 무시한 결과였고 석재사업의 포기와 동시에 김 대표에게 석산의 인수를 제안한 것이다. 36세의 젊은 청년이 복합영농인에서 석재사업가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김 대표는 인수 후 나주시로부터 자연석 반출을 허가 받았고 채취된 자연석들은 쉴 사이 없이 팔려 나갔다. 당시 동신대학교의 건설을 비롯한 호남대 대불대 등 각종 건설의 붐은 그에게 부(富)를 가져다주었다. 자연석 채취 후 남아 작게 부서진 석재들은 건설용 자재로 팔려나가 남은 것이 없을 정도로 분주했었다.

김 대표의 초등학교 시절에 할아버지는 ‘우리 용화 농사를 짓게 하는 것보다 장사를 시켜야 걷다.’하면 손잡고 시장을 데리고 다니셨다. 장남을 공부시켜 성공의 길을 걷게 하고 싶었던 어머님께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가슴속에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장손의 미래를 보는 안목을 가진 것이 증명된 것이다.

하지만 김 대표의 진면목은 돈을 모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품의 미학을 실천하는 데 있었다. 94년도와 2001년도 전남 지역을 목마르게 했던 대가뭄 때 보여준 그의 봉사·기부활동은 피해농민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가뭄극복에 도움이 되었다. 또한 석산에서 나온 석재로 봉황면 40여개의 마을 앞에 표지석을 세워 지역의 이정표역할을 다했다.
당시 그의 선행과 봉사는 널리 알려져 봉사의 대부로 불릴 정도로 지역민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국무총리 상을 비롯하여 15개에 가까운 수상으로 보답을 받기도 했었다. 또한 본인의 뜻과는 다르게 정치에 입문을 권유받는 계기가 되었고 정치에 대한 입지를 세우기도 했었다. 정치에 입문을 하기 바로 직전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치를 포기하게 되어 지금도 자그마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세상사(世上事)는 항상 좋은 일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2008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대형 교통사고가 있었지만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생명을 보전(保全)했었다. 특히 2008년 오토바이를 타고 작업현장에 가던 도중 사고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었지만 하늘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몇 일간의 의식불명 속에서도 그를 지켜주었던 사랑했던 아내에 대한 고마음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600여명이 방문객들도 김 대표의 회생에 일조했었고 살아온 인생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이에 감동한 김 대표는 퇴원 후 모두에게 감사의 편지를 드렸다는 내용과 방문객들에게 평생 보답의 의지를 전했다.

사고 후 가족회의에서 그의 사업능력을 깨우쳐준 만봉석산의 처분을 결정했다. 아쉬웠지만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상태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고 ‘덤으로 사는 인생 더욱 많은 봉사로 사회에 보답하겠다.’하는 의지로 새로운 삶을 시작 했다.

김 대표 그의 성공가도는 ‘근면 성실 인지도 인적네크’ 이었음을 강조하며 "불필요한 낭비 자제를 권유하고 후배들에게는 지역을 이끌어 갈 준비’를 권장한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역민과 선·후배들이 권유하는 지역에서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그의 자세 또한 매우 진지해 보인다.

항상 곁을 지켜주는 큰 버팀목인 사랑하는 아내는 오늘도 김 대표의 건강에 초점을 맞추고 긴장하며 살아가고 있다. 불과 몇 달 전의 두 번째 대형 교통사고는 그녀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고 더욱 더 많은 애정을 쏟고 있다. 사랑이라는 울타리로 그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가 더욱 아름다워 보이고 행복한 모습으로 내공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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