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획
  • 기자명 나주토픽 기자

나주가 낳은 집념의 기업인 금호아시아나 창업주 고(故) 금호(錦湖) 박인천(朴仁天) 회장

  • 입력 2016.01.16 10:15
  • 수정 2016.01.16 10:16
  • 댓글 0

나주가 낳은 집념의 기업인 금호아시아나 창업주 고(故) 금호(錦湖) 박인천(朴仁天) 회장
 
택시 2대에서 고속버스 사업으로 호남을 일으키고 또 다른 하늘 길을 찾아 금호아시아나를 창립

고 금호 박인천 회장
본지 51호에서는 신년 특집으로 대신그릅 고(故) 양재봉 회장에 이어 1984년 6월 16일 고인이 된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인천 창업회장을 기리며 ‘부지런함·성실·정직·책임감·끈기’ 다섯 가지를 정신으로 대기업을 이룬 고 박인천 회장을 소개해 본다.

금호 박인천 회장(1901~1984 이하 박 회장)은 1901년 7월 5일 전라남도 나주시 죽포면 동산마을 일명 신기(新基)부락(현 나주시 다시면 신석리 동산마을)에서 부친 고(故) 박옥용(朴玉容)과 모친 고(故) 김현금(金賢金)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고 가족은 배우자 이순정 여사 아들 박성용, 박정구 박삼구 박찬구 박종구 딸 박경애, 박강자 박현주 4남 3녀를 두었고 대한민국의 도로 점령은 물론 세계 영공을 휘젓고 있는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한 시대의 거인(巨人)이었다.

박 회장은 일곱 살이 되던 1907년에 부친은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불의에 가장을 잃은 가족들은 암담했으며, 당시 조선을 침탈(侵奪)했던 일제의 수탈과 잦은 흉년으로 모든 것이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박 회장의 예명은 재곤(在坤)으로 유달리 성미가 불같고 고집이 세어 남에게 지기를 싫어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씨가 따뜻하여 동네 또래의 우상이었고 항상 그를 따르는 등 타고난 보스의 기질이 있었다. 박 회장은 열한 살이 되던 해부터 서당(書堂)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다.

특유의 오기와 총명함으로 항상 제일 앞서는 성적을 차지하였고, 열다섯 살 무렵에는 면내 팔현강당(八賢講堂)에서 주최하는 강경시합(講經試合)에 출전하여 대학(大學)부문 최우수에 뽑히기도 하였다.
▲ 1973년 그룹체제로 출범한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인천 회장(중앙)이 지주회사인 금호실업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관철동 43 삼양빌딩에서 그룹 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사진=금호아시아나그룹]

그러나 급속하게 개명(開明)하는 세상이 열리면서 구식(舊式) 한학(漢學) 공부에 한계를 느낀 박 회장은 늦었지만 가족을 설득하여 17세가 되던 1917년 4월 나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2월, ‘일본인교장 배척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하고 만다.결국 박 회장은 상경을 결심하고 집안의 소를 처분한 돈 40원(圓 : 1원의 가치는 당시 순금 2푼 750mg, 1/5돈)을 가지고 가족들 몰래 서울로 향하여 1919년 가을 중동학교 초등과에 입학하지만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상경 6~7개월 만에 귀향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20년 20세 때 나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 광주에 나와 목화(실면)를 취급하는 장사와 잡화상을 시작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 후 목포에서 시작한 미곡상, 송정리에서 가마니 장사, 또 무명장사 또한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다시 상경 한 후 오성강습소에서 5개월, 중동학교에서 3개월을 수학하여 29세 때인 1929년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순사보, 순사부장이 되었고 해방 전 경부로 진급하여 근무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